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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오늘] 그 여름 명동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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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12일 밤 11시30분. 명동성당에 있는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김수환 추기경의 집무실 문을 누군가가 두들겼다. 김 추기경이 그들에게 물었다. "학생들을 연행하기 위해 오늘 밤 경찰력을 투입하겠다는 통보를 하러 오신 거지요?" 추기경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경찰이 성당에 들어오면 제일 먼저 나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다음에는 밤샘 기도를 하고 있는 신부들, 그 뒤에는 수녀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연행하려는 학생들은 수녀들 뒤에 있을 겁니다. 그들을 체포하려거든 나를 밟고 그다음에 신부와 수녀들을 밟고 지나가십시오."


6월10일에 시작된 '고문살인 은폐 규탄 및 호헌 철폐 국민대회'가 중대 고비를 맞고 있었다. 6월9일엔 연세대 학생 이한열이 시위 도중 머리에 최루탄을 맞아 사경을 헤맸다. 시민들은 분노했다. 넥타이를 맨 채 "호헌 철폐! 독재 타도!"를 외치며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경찰은 강경 진압했다. 최루탄에 쫓긴 시위대는 명동성당으로 피신해 농성에 들어갔다. 그리고 사흘이 지난 것이다.

항쟁이 시작되기 한 달 전인 5월18일, 김 추기경은 명동성당에서 월요일 특별미사를 집전했다. 천주교는 이 미사에서 광주 민주항쟁 7주기와 경찰의 고문으로 목숨을 잃은 박종철군을 추모했다. 추기경은 이날 강론에서 앞으로 일어날 일과 해야 할 일을 예고했다. 그는 "눈 감고 귀 먹고 외면한 죄를 용서하십시오"라고 통회하며 "사제로서 전 생애를 바쳐 이 시대 구원의 십자가를 짊어지자"고 했다. 그의 호소는 신자들뿐 아니라 우리 사회의 양심을 움직였다.


"하느님께서 동생 아벨을 죽인 카인에게 물으시니 카인은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하고 잡아떼며 모른다고 대답합니다. 창세기의 이 물음이 오늘 우리에게 던져지고 있습니다. '너의 아들, 너의 국민의 한 사람인 박종철은 어디 있느냐?' '탕 하고 책상을 치자 억 하고 쓰러졌으니, 나는 모릅니다' … '국가를 위해 일을 하다 보면 실수로 희생될 수도 있는 것 아니오?' 바로, 카인의 대답입니다."


박종철과 이한열의 잇단 죽음은 민주주의의 제단에 바친 생명의 꽃무리였다. 꽃은 스러졌으나 시민들의 가슴 속에 '가장 작은 촛불 하나라도 지켜내야 한다'라는 각오를 싹틔웠다. 젊은 희생은 대한민국의 언론에도 고해성사할 기회를 줬다. "카인은 어디 있느냐?" 이는 곧 '박종철을 죽인 살인자는 누구냐'라는 추궁이었다. 언론은 답해야 했다. 신문기자 김중배의 칼럼이 읽는 이의 심장을 고동치게 했다.

"하늘이여, 땅이여, 사람들이여. 저 죽음을 응시해주기 바란다. 저 죽음을 끝내 지켜주기 바란다. 저 죽음을 다시 죽이지 말아주기 바란다. 그의 죽음은 이 하늘과 이 땅과 이 사람들의 회생을 호소한다. 정의를 가리지 못하는 하늘은 '제 하늘'이 아니다. 평화를 심지 못하는 땅은 '제 땅'이 아니다. 인권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은 '제 사람들'이 아니다." (1987년 1월17일 자 동아일보)


김 추기경이 지켜낸 시위대는 6월15일 오후 성당을 떠났다. 그러나 타오르기 시작한 불꽃은 더 넓게 번져나갔다. 권력은 대통령 직선제라는 국민의 명령 앞에 굴복했다. 시민들이 간직한 승리의 기억은 정의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믿음과 더불어 오늘로 이어진다. 촛불혁명은 그 결실의 일부다. 대한민국 민주주의. 국민이 쌓아올린 위대한 역사의 탑 한편에서 추기경의 이름도 머릿돌이 되어 빛난다.


허진석 시인·한국체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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