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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재웅의 행인일기 55] 보르게세 공원의 소나기 속에서

최종수정 2019.08.09 11:09 기사입력 2019.08.09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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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재웅

윤재웅

오늘 일요일입니다. 로마에선 아침부터 마라톤 대회가 열립니다. 유럽의 여러 도시에서 곧잘 볼 수 있지요. 일요일 달리기. 휴식과 달리기 문화의 결합은 어쩐지 어울리지 않습니다. 저 같으면 빈둥거리며 지내는 게 좋은데, 어떤 이들은 그토록 달콤한 일요일에 죽어라고 달립니다. 고대 그리스의 한 병사가 마라톤 평원에서의 승리를 알리기 위해 아테네까지 달려가서 승전보를 알리고 죽었다지요. 그 거리가 42.195㎞여서 오늘도 '승리의 기쁨을 전하는 죽음'을 기념하기 위해 같은 거리를 달립니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우승한 황영조 선수는 어느 인터뷰에서 말합니다. "레이스 후반에 접어들면 속도를 늦추고 싶어도 늦출 수 없고 주저앉고 싶어도 주저앉을 수 없습니다. 미친 듯이 달릴 줄밖에 모르는 나 자신이 마치 '달리는 기계'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위대한 마라토너도 '달리기 철학'에 강한 의문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는군요. 베네치아 광장을 가로질러 달리는 수많은 군중들을 보면서 저도 비슷한 생각을 해봅니다. '달린다는 건 무엇일까?' 오늘 하루, 이곳저곳 돌아다니다 쉬고 싶어 찾아간 곳. 보르게세공원에서 그 의미를 비로소 찾습니다. 일요일이면 찾다 찾다 아직 못 찾은 마지막 골목을 찾아 떠나는 마음처럼 말입니다.


서정주의 시 '일요일이 오거든'에 이런 구절이 있지요. "일요일이 오거든/친구여/인제는 우리 눈 아주 다 깨여서/찾다 찾다 놓아둔/우리 아직 못 찾은/마지막 골목들을 찾아가 볼까?" 생의 달콤한 휴일. 이런 날일수록 눈 밝혀서 그간 찾지 못한 삶의 비밀을 찾아보자고 하네요. 일요일은 삶의 비밀을 찾는 특별한 날. 그런 날로 바꾸어야 한다는 뜻이지요.


로마의 여름 날씨는 변화무쌍합니다. 화창하던 오전 날씨가 오후가 되자 돌변합니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 김수영 시 '풀'에 나오는 그 바람이 먼 하늘의 비 냄새를 몰아옵니다. 지친 다리를 쉬러 보르게세공원 언덕을 오르는데 먹구름이 하늘을 덮기 시작합니다. 어디서 온 게 아니라, 아무 것도 없는 하늘에서 만들어지는 중입니다.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입니다. 있는가 했더니 없고, 없는가 했더니 있습니다. 있고 없고가 한결같지 않습니다. 로마 하늘 전체가 먹구름에 덮이더니 우르릉 우르릉 공중을 울립니다.


[윤재웅의 행인일기 55] 보르게세 공원의 소나기 속에서

널따란 공원 광장을 거닐던 사람들이 갑자기 뛰기 시작합니다. 사람이 달려야 하는 이유를 소나기 속에서 실감나게 경험합니다. 척추와 고관절과 무릎관절과 발목관절이 유기적으로 움직입니다. 어깨관절과 팔굽관절 역시 리듬에 맞춰 오케스트라 단원처럼 조화를 이루네요. 수백만 년 진화의 기적을 새삼스레 봅니다. 분석심리학의 개척자인 칼 구스타프 융(1875~1961)이 인간 육체를 가리켜 새로 이름 지은 '계통발생학적 역사박물관'. 생물학적 선조의 유전 정보를 고스란히 보관한 인간 박물관들이 보르게세공원 소나기 속을 뛰어다닙니다. 마라톤보다 아름답고 자연스럽습니다. 승리의 이념도, 스스로의 한계를 돌파하자는 그럴싸한 이야기도 없습니다. 인류가 최초로 뜀박질 한 이유는? 그야 뻔하지 않습니까. 제 엉뚱한 상상은 소나기 때문이라고 답하는 중이지요. 이런 식으로, 로마 여름의 어느 일요일에, 저는 '인간 진화의 골목'을 바라봅니다. 당황한 듯, 다급한 듯, 팔다리가 흔들흔들, 겅중겅중, 자유분방합니다. 오, 저토록 활달한 몸의 축제!

'역사박물관'들은 잠시 뒤 커다란 나무 아래 모입니다. 이들은 시원한 소나기 음악공연의 관람객이기도 하지요. 1회용 우산장수들이 스르륵 나타납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없었는데 땅에서 솟았는지 나무에서 걸어 나왔는지 신기합니다. 공즉시색입니다. 많이 팔리면 좋으련만…. 그러면 또 색즉시공입니다. 누군가의 손에 재물이 생기면 다른 누군가의 손에서 그것은 사라집니다.


소나기 공연의 또 다른 참가자는 자전거 타는 사람들. 2인용 자전거를 타는 남녀는 비를 피하려는 게 아니라 오히려 즐깁니다. 온몸이 젖어도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소리를 지릅니다. 천막이 있는 4인용 자전거도 지나갑니다. 이들 역시 즐겁습니다. 소리를 지르지는 않지만 나무 아래 사람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줍니다. 즐거움의 기원. 예기치 않은 파탄으로부터도 오나 봅니다.


이곳 보르게세공원에는 바티칸 다음으로 많은 회화 작품을 소장한 미술관이 있지요. 저는 미술관 관람보다 지금의 소나기 공연이 즐겁습니다. 비가 잠시 멈춘 사이 서편 전망대로 가봅니다. 먹구름 사이로 부챗살같은 햇살이 펼쳐지는 아름다운 정경. 멀리 테레베강 건너 바티칸이 보이고, 바로 앞에 포폴로광장이 거울처럼 빛납니다. 비가 내려 호면(湖面)처럼 변한 광장 바닥이 하늘을 비추네요. 광장 중앙의 오벨리스크와 주변의 나무들이며 하늘의 구름들이 땅바닥에 나타납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실제와 환상의 경계가 없는 경지. 로마의 일요일 오후, 보르게세공원의 소나기 속에서 찾은 '자연의 골목'입니다.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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