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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딴섬 고시원③·르포]하룻밤 1만2000원…'먹방'에 불이 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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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프링클러 없고 13년 된 소화기만 덩그러니
미세먼지 '나쁨'에 환풍기만 돌릴 뿐
방 크기는 大자로 눕기도 힘든 3.2㎡

기자가 하루를 보낸 25호실의 전경. 방의 크기는 1평(약 3.3㎡)도 되지 않았다.

기자가 하루를 보낸 25호실의 전경. 방의 크기는 1평(약 3.3㎡)도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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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이춘희 수습기자] “하루에 1만2000원이고, 열쇠 필요하면 보증금 1만원이에요. 창 있는 방은 1000원 더 내야하고.”


서울 양천구의 한 고시원. 4층 계단을 올라 고시원 문을 열자마자 어두컴컴하고 조용한 복도가 눈에 들어온다. 방을 문의하자 고시원장 김모씨가 이른바 '먹방'이라 불리는 창문없는 방 하나를 보여준다. 하루 머무는 데 드는 비용은 1만2000원. 창문이 있는 방은 여기에 1000원이 더 추가 되지만, 대체로 가장 싼 먹방부터 사람이 찬다는 게 김 원장의 설명이다.

방은 예상대로 좁고 낡은 모습이다. 이제는 보기 힘든 13인치 배불뚝이 브라운관 TV와 47ℓ 소형 냉장고, 옷장을 겸한 서랍장과 책상, 그리고 침대가 세간의 전부. 벽에는 떨어지고 찢긴 흠을 덧댄 다양한 무늬의 벽지들이 군데군데 붙어있다. 원장은 TV를 틀어보더니 “분명 어제는 됐는데 오늘은 안 된다”며 “와이파이만 되면 괜찮지 않느냐”고 되묻는다. 잠시 어색한 침묵 끝에 원장이 떠났고, 작은 방에 불을 켜고 침대 위에 몸을 뉘였다.


방은 적막했다. 하지만 이내 바깥의 소음들이 석고보드 벽을 타고 들려왔다. 식사를 준비하는 부엌의 덜그럭 소리, 샤워장에서 물 트는 소리, 옆 방 거주자가 뒤척이며 부스럭대는 소리. 서울의 대기질이 미세먼지 '나쁨' 수준이던 이 날, 바깥에서보다 더욱 목이 따갑게 느껴진다. 더 나아질 것 같진 않았지만, 환풍기를 켜 봤다. 작은 방은 '위이이잉' 환풍기 돌아가는 소리로 가득찬다.

양천구 신정동 한 고시원의 복도. 0.85m의 폭 중 중간 내벽이 튀어나온 곳은 0.55m에 불과하기도 했다. 성인 남성 한 명이 겨우 지나갈 수 있는 너비다.

양천구 신정동 한 고시원의 복도. 0.85m의 폭 중 중간 내벽이 튀어나온 곳은 0.55m에 불과하기도 했다. 성인 남성 한 명이 겨우 지나갈 수 있는 너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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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 공기가 들어오자 이내 서늘해진다. 원장이 추울 때 사용하라고 안내해 준 침대 위 전기장판을 켰다. 고시원 같은 다중이용시설에서 전열기구 사용은 불법은 아니다. 하지만 일선 소방서에서는 고시원 내 사용을 금지하는 등 전열기구를 고시원 화재의 가장 큰 원인 중 하나로 꼽는다. 실제로 지난해 11월 7명의 사망자를 낳은 종로구 국일고시원 화재사고도 실내 전열기구 사용이 발단이 됐다.


아무리 두리번거려봐도 스프링클러는 보이지 않는다. 2009년 개정된 ‘다중이용시설의 안전관리에 대한 특별법’은 고시원 등의 다중이용업소에 화재 초기 진압을 위한 스프링클러를 설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경보설비 역시 연기감지기만 있을 뿐 열 감지기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설치했던 흔적만 남아있다. 책상 아래에는 1.5kg짜리 분말 소화기가 놓여있다. 이 소화기의 생일은 2006년 10월. 소방청이 권장하는 사용기한 10년을 한참 넘겼다. 소화기의 성능을 표시하는 지시압력계의 노란 바늘도 사용권장범위인 녹색구간을 넘어서고 있었다.

고시원 방에 비치된 소화기. 권장사용기간인 10년을 훌쩍 넘어있다.

고시원 방에 비치된 소화기. 권장사용기간인 10년을 훌쩍 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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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해온 줄자를 꺼내 방을 실측했다. 가로 1.6m, 세로 2m. 곱하면 3.2㎡. 국토교통부에서 정한 1인가구 최소 주거면적 14㎡는 물론 사람 1명이 대(大)자로 누울 수 있는 면적인 ‘1평’(약 3.3㎡)에도 미치지 못하는 크기다.

멍하니 휴대폰을 바라보다 저녁 7시가 되자 다닥다닥 붙은 40여개의 방에는 하나 둘 불이 들어왔다. 복도와 맞닿은 작은 창에 신문지를 덧댄 문도 있다. 부엌에서 식사가 가능했지만, 함께 모여 밥을 먹는 모습은 볼 수 없다. 누군가 기척이 있으면 조용히 방으로 돌아가, 다른 사람의 식사가 끝나길 기다렸다. 그렇게 배턴을 넘기듯 한 사람씩만 식탁에 앉았다.


하루 간의 고시원 생활 도중 기자는 6명의 투숙객과 마주쳤다. 50대 내외로 보이는 이들은 모두들 갑작스레 나타난 젊은 남성을 신기한 눈길로 잠시 쳐다본다. 인사를 건네며 "얼마나 계셨느냐"고 말을 붙였지만, 모두 "알아서 뭐하게요"라며 퉁명스레 대꾸했다. 서로에게 거는 기대도, 관심도 없이 외딴 섬에서 다들 입을 닫았다.






이춘희 수습기자 spring@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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