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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길의 가을귀]인류의 가장 지독한 惡...인종차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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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시 헤드 '권력의 문제'

[이종길의 가을귀]인류의 가장 지독한 惡...인종차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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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 어머니·흑인 아버지 사이 태어난 저자…혼혈차별·성폭력·정치적 망명 등 굴곡진 삶
소설 주인공 엘리자베스에 자신을 투영…선과 악의 처절한 정신세계 사실적 묘사

"너에 대한 기록은 빠짐없이 다 가지고 있어. 아주 조심해야 할 거야. 네 엄마가 정신이 나갔었잖아. 조심하지 않으면 너도 엄마처럼 미쳐버릴 수 있어. 네 엄마는 백인이었다. 원주민인 마구간 흑인 녀석의 애를 낳았으니 사람들이 그녀를 가둬버린 거지."
베시 헤드의 '권력의 문제(1974년)'에 묘사된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차갑고 혹독하다. 아무도 주인공 엘리자베스를 위로하지 않는다. 도피처로 생각한 선교학교의 교장조차 그녀를 무시하고 괄시한다. 엘리자베스가 울음을 터뜨리자 자기 딴에는 다정한 모습을 보인답시고 타이른다. "울지 마라. 네 엄마는 네 생각을 많이 했던 좋은 분이셨어." 교장은 서랍에서 유서를 찾아 읽어준다. "제발 우리 딸의 교육을 위한 돈은 따로 남겨두시고…." 모녀의 삶은 어쩌다 이 모양 이 꼴이 되었을까. 이유는 단순하다. 혼혈아다.
엘리자베스는 저자라고 봐도 무방하다. 헤드는 1937년 남아공에서 부유한 백인 어머니와 흑인 하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당시 남아공에서는 백인과 흑인의 결혼 및 성행위를 금지하는 '부도덕법(Immorality Act)'이 시행됐다. 1948년에는 아프리카너가 주도하는 국민당이 정권을 잡아 인종격리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를 공식 정책으로 삼았다. 헤드는 존재 자체를 부정당했다. 백인과 흑인 위탁가정에서 모두 쫓겨나 아웃사이더로 지냈다. 그녀는 범아프리카회의에 가담해 펼친 정치활동이 빌미가 돼 고국에서 영구 추방됐다. 어렵게 망명한 보츠와나에서도 15년 동안 시민권을 받지 못했다. 권력의 문제는 그 가시밭길을 복기하며 쓴 장편소설이다. 헤드가 인종차별로 겪은 신경증이 엘리자베스의 생각과 행위에 그대로 투영됐다.

그녀의 성찰은 앞서 발표한 소설 '비구름이 모일 때(1969년)'와 '마루(1971년)'보다 완숙하다. 비구름이 모일 때의 주인공 마카야는 엘리자베스처럼 보츠와나로 망명한다. 혼혈에 대한 편견은 물론 부족 간의 위계와 배타적 태도를 목격한다. 헤드는 이 과정을 기술하면서 아프리카가 어떻게 기술과 경영의 진보를 통해 화합하고 경제적 자립을 이룰 수 있을지에 주목한다. 또 어떻게 그들 스스로 정치적 압제로부터 풀려나 인간의 존엄을 회복할 수 있을지를 탐구한다. 마루에서는 부족 간 위계와 차별을 전면에 놓고 다룬다. 주인공 마거릿은 '부시맨'이라 불리는 산 족 태생이다. 백인 선교사에 의해 백인처럼 길러진다. 헤드는 그녀를 통해 혼혈이 흑백의 이분법을 교란하는 것처럼 부족 간의 위계를 흑백의 위계와 교차하며 뒤흔든다. 여기서 나타나는 편견과 부족 간 위계는 차기 족장인 마루와 그녀의 결혼으로 해결한다. 노란 데이지 꽃으로 그 세계를 형상화해 축복과 자유를 가리킨다. 헤드는 두 작품에서 인종적 차이를 선악의 존재론적 차이로 환원하는 이데올로기에 맞서 그 사회경제적ㆍ제도적 근원을 밝혀내는데 주력했다. 권력의 문제에서는 그 차원을 넘어 인간 본성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인종차별이 인간의 역사 대부분에서 존재한 사실을 인지시키면서 이를 인간이 인간에게 가하는 가장 지독한 악으로 규정한다.

악의 실체는 엘리자베스가 정신병원에 수용됐다가 간신히 제정신으로 돌아오는 이야기에서 나타난다. 그 구성은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일과 일상적 삶으로 구분된다. 어린 아들과 지역 프로젝트를 함께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정상적인 삶을 정신적 차원에서 벌어지는 삶과 극명하게 충돌시키면서 악의 근원에 다가가는 식이다. "그녀의 커다란 울부짖음은 내적인 고통의 논리에 따른 것이었지만 그래도 매한가지였다. 그녀를 내리누르는 악의 존재는 그녀가 도망쳐온 남아프리카공화국과 유사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논리에 있어서나 극악함에 있어서나 마찬가지였다. 단지 이번에는 검은 얼굴도 동네 사람도 아니고, 거대하게 앞을 막아서는 영혼의 인물들이라는 게 달랐을 뿐."
엘리자베스의 정신세계에서 선과 악은 쎌로와 댄으로 대변된다. 그런데 쎌로가 엘리자베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상징적이고 모호하며 포괄적이다. 각각의 의미를 따지기도 어렵다. 다양한 종교의 힘을 빌려 현실의 악을 물리치는 듯하나 정작 악의 실체는 파악하지 못한다. 그래서 쎌로는 댄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한다. "하지만 그날 밤, 그녀는 선함의 논리에 대해서만 곰곰 생각하던 중에 선함이 고통 역시 정당화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그가 용의주도하게 일을 해나갔던 거야,' 그녀는 생각했다. '선과 악이 한 사람 안에서 나란히 함께 움직인다는 사실을 보게 된 거지. 그래서 그 악에 대한 진단을 내리고 그것을 따로 분리한 다름 끝내버린 거야. 이제 더 이상 메두사는 없어.'"

절대적 선에 대한 믿음은 악에 맞설 힘을 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만큼 우리를 취약하게 만들기도 한다. 이를 구분하는 이분법적 사고는 어떤 종교에서나 쉽게 발견된다. 쎌로가 엘리자베스의 환상 속 인물만이 아니라 실제 인물이기도 한 점을 감안하면, 현실세계에서도 똑같이 적용된다고 할 수 있다. 엘리자베스는 그 속에서 혼란에 사로잡힌다. 선하기만 한 혁명적 지도자와 악하기만 한 폭압적인 독재자의 이분법에 묶여 실제의 쎌로를 비방하는 정신분열적 행위에까지 이르게 된다.

허술한 틈을 비집고 들어온 댄은 쎌로를 끌어내리고 폭력적으로 비대화된 남성성으로 엘리자베스를 무너뜨리려고 한다. 이 기술이 헤드가 실제로 겪은 환영이라면, 성적 욕망으로 점철된 댄과 여자들의 관계는 남녀관계나 결혼에서의 실패라는 그녀의 자의식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다. 엘리자베스가 쎌로의 변태적 성욕에 대한 모함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마을사람들의 추하고 내밀한 욕망을 적나라하게 마주하면서 실제 삶에서 그들과 관계를 유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헤드의 발자취도 그 정도로 처절하고 잔혹했다. 하지만 펜을 잡으면서 새로운 희망을 들여다봤다. 이 책에서도 엘리자베스가 댄에게 휘둘리던 상태에서 벗어나는 결말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래서 끝까지 읽어야 초반 기술한 내용의 의미를 제대로 알 수 있다. 헤드는 긴 성찰의 끝에서 어떤 진리를 깨달았을까. 그녀는 말한다. "사랑은 그런 게 아니야. 사랑은 서로에게 자양분을 주는 것이지, 시체를 뜯어먹는 악귀처럼 한쪽이 다른 쪽의 영혼을 빨아먹는 게 아니라고."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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