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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재웅의 행인일기 11] 비야마요르 밀밭 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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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시골길 아름답습니다. 하늘 푸른 봄 아침에, 새소리 햇빛 속에 부서지기 시작할 때, 진초록 밀밭 길을 걷습니다. 풍경도 음악인가 봅니다. 멀리에 가까이에, 노랑 유채 꽃동산이 화음을 넣습니다. 슬쩍슬쩍 바람이 붑니다. 강약 중강약 밀들이 춤추고 유채가 박수칩니다.

나는 온몸으로 들판의 음악을 마시고 냄새로 들어오는 식물 편지도 읽습니다. 첫 문장이 씨눈 터질 듯 꼬물거립니다. 부엔 카미노(Buen Camino)! 좋은 길! 마주치는 사람마다 상냥하게 나누는 인사말입니다. 천천히, 천천히, 편지 향기 음미합니다. 누구에게든 첫인사는 씨눈 터지듯, 그 사람 마음에 씨눈 터지듯 하면 좋겠습니다.
에스테야(Estella)에서 로스 아르코스(Los Arcos)까지 가는 길입니다. 십리도 더 돼 보이는 장대한 병풍바위. '용서의 언덕'에서 아스라이 보였던 기다란 바위절벽들이 아침 햇살에 깨끗하게 빛납니다. 두근거리는 가슴, 참 오랜만입니다. 괴테는 가슴이 두근거리지 않으면 그때부터 늙는 거라 했다지요. 평생토록 산을 사랑했던 시인 장호. '한국백명산기'와 '나는 아무래도 산으로 가야겠다'를 남긴 희대의 걸출한 산악 에세이스트 김장호. 늙어서도 산만 보면 가슴 두근거렸던 제 선생님 생각납니다. 저 시원 장쾌한 절벽바위들을 보면 그분은 또 하늘 한쪽에 숨겨둔 구름 두근거리는 소리로 좋아라 하실 테죠.

밀밭 교향악은 계속됩니다. 사방천리 초록 바다입니다. 바늘구멍만큼의 빈틈도 없이 천지에 꽉 들어찬 찬연한 햇살. 산과 들과 나무와 풀과…, 꽃과 벌과 나비의 날갯짓 사이마다 허투루 빠져나갈 길 도무지 없는 하늘의 밝은 술. 오, 저토록 완전한 충만! 그리고 천천히 일렁이는 천지의 에로스. 고개 들어보니 지휘자는 고깔 모양 산 정상의 몬하르딘 성채. 지휘봉 잡은 채 천 년 전부터 천지 오케스트라를 이끌어왔을 겁니다. 성채 아래 650고지의 비야마요르 데 몬하르딘(Villamayor de Monjardin) 마을. 아담하고 정갈합니다. 골목 갈림길마다 산티아고 가는 조가비 표시가 나보란 듯 박혀 있습니다.

길은 다시 들판 쪽으로 내려갑니다. 길고 먼 길. 외줄기로 흐르는 길. 저 멀리 구부러져 돌아가는 곳. 갓 스물 근위병 같은 포플러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는 그 굽이에 무언가 보입니다. 키 큰 남자가 키 작은 여자와 포옹을 합니다. 잠시 뒤 남자는 자기 목을 지팡이 손잡이처럼 구부려 여자에게 키스합니다. 그들은 한동안 그렇게 있었어요. 아내는 황홀하게 쳐다봅니다. 저 풍경 음악입니다. 자연만 음악 아니라 사람도 음악입니다.
비틀스의 <길고 구부러진 길(The long and winding road)> 생각납니다. '…오랜 시간 난 혼자였고 많이 울었죠. 사랑의 쓰린 마음 달래기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 당신은 모르실 테죠. 하지만 애썼던 그 시간들이 날 다시 길고 구부러진 길로 이끄네요. 아주 오래전 당신은 날 떠났죠. 더 이상 날 기다리게 하지 마세요. 당신께로 이끌어주세요.' 실연의 슬픔 절절한 마음에 담았는데, 길 위의 남녀를 보니 공연히 감정이 이입됩니다. 당신께로 이끌어주세요! 천지의 에로스가 이들에게 포옹과 키스를 가르쳤을 겁니다. 발걸음 빨리 해서 가까이 따라붙어 봅니다. 놀랍게도 곱게 나이 드신 노부부네요. 씨눈 터지듯, 인사를 해봅니다. 부엔 카미노! 부엔 카미노!!

잠시 뒤 그녀 혼자 떨어집니다. 길옆으로 나와 카메라로 무언가를 찍습니다. 밭에서 막 돋아나는 아스파라거스네요. '아기 아스파라거스 태어나는 거 놀랍죠?' 말을 붙여보니 그녀는 명랑 쾌활한 일흔 두 살. 팔찌를 많이 차고 있었는데 둘러보던 아내가 자기 것과 똑같은 팔찌가 있다고 하자 오늘 아침 길에서 주웠다고 합니다. 순간 아내는 자기 팔에 차고 있던 두 개의 같은 팔찌 중 하나가 없어진 걸 발견하고 숙소의 욕실에서 떨어뜨린 걸 알게 됩니다.

세계의 여행지마다 팔찌 구해 모으는 게 취미인 할머니. 그녀가 다음 차례로 샤워를 하다 그걸 주웠던 걸까요. 기묘한 우연의 일치에 놀라는 아내. 가슴이 진정되지 않는 모양입니다. 그들이 길고 구부러진 길에서 포옹을 하지 않았더라면…, 키스를 하지 않았더라면…, 아기 아스파라거스가 경이롭게 머리를 내놓지 않았더라면…. 사태를 파악한 할머니가 돌려주겠다고 하자 아내는 팔찌가 이제야 주인을 만난 것 같다며 사양합니다. '당신 하나, 나 하나, 나누어 가지라는 게 하늘의 뜻인가 봐요.'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제게 속삭입니다. '인생길 참 깊다. 저 할머니랑 나랑 전생의 부부였나 보네!'

봄바람 다시 붑니다. 키 큰 남자는 햇살 따라 휘적휘적 먼저 가고 없습니다. 그녀는 아내와 활짝 웃으며 사진 찍습니다. 그러고는 키 큰 남자의 뒤를 따라 다람쥐처럼 빠르게 달아납니다. 하늘 푸른 봄 아침 스페인 시골길 교향악. 어떤 음악회가 이처럼 아름다울까요.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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