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1만4800원
[아시아경제 임온유 기자] '넌 나에게 상처를 주지 못한다.' 내 삶의 기본 자세다. 노력한 것은 아니고 어쩌다보니 만들어진 것 같다. 덕분에 꽤 살기가 편하다. 내게 날아든 불합리함을 때때로 거부했고 때때로 무시했다. 여태껏 여자라서 차별받거나 손해본 적 없다고 생각한 것도 이런 태도 때문이 아닌가 한다. 누구에게나 '싫다'고 말할 수 있으니까. 적어도 지금까지는 동일노동에 동일임금을 받고있기도 하고.
그런데 신간 '나다운 페미니즘'의 책장을 넘기면서 내 생각이 어쩌면 착각일 수 있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책은 작가, 발레리나, 배우, 가수, 영화감독, 만화가 등 다양한 직업을 가진 페미니스트 44인의 이야기를 실었다. 이들은 저마다 자신이 생각하는 페미니즘이 무엇인지 털어놓는데 그 중 작가 수재나 와이스는 내게 '나 역시 차별 받았다'는 사실을 알려준 사람이다.
"거기가 여자한테 얼마나 험하고 더러운 세계인지 네가 알기나 해?" 고2 외동딸이 가수가 되고싶다 하자 아버지가 놀라 내뱉은 말이었다. 결론적으로 난 사범대를 졸업하고 기자가 된 지금까지도 가을마다 '가수병'을 앓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여자라서 내 꿈을 포기한 건가' 싶은 거다.
또 다른 기억도 있다. 대학생 때 자신의 성경험 혹은 성매매 경험을 보란듯 내뱉는 남자 선배들이 있었다. 그때 나는 불쾌함을 감추고 모르는 척, 못들은 척 했는데 이것 말고 다른 선택지가 있었나 싶다. 난 그 순간 만큼은 마음대로 표현할 자유를 잃은 셈이다. 그럼에도 나는 왜 여자라서 손해본 적 없다고 생각하며 살았을까. 젠더 감수성이 부족했던 걸까, 인정하기 싫었던 걸까.
"기자님은 페미니스트세요?" 얼마 전 한 남자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고 우물쭈물한 경험이 있다. 페미니즘의 제대로 된 정의도 모르거니와 요즘 페미니스트=못된 사람이라 여기는 분위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이 책이 알려준 건 열 사람의 페미니즘이 열 개의 다른 모습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미르자와 켄들이 페미니즘을 두고 '완벽한 여성 한 사람의 발에 꼭 맞는 유리 구두가 아니라 우리 모두를 보호할 수 있는 커다란 우산'이라고 묘사한 것과 같은 결의 이야기다. 내게 페미니즘이란 페미니즘을 알아가려는 노력, 차별 받았다고 인정하고 말할 수 있는 용기인 듯하다.
<코트니 서머스 , 애슐리 호프 페레스, 정세랑, 이랑 등 44인 지음/박다솜 옮김/창비/1만4800원>
임온유 기자 ioy@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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