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네스 브래너 감독 '오리엔트 특급 살인'
정통 추리 장르에 속하는 외국영화가 우리 시장에서 크게 성공한 사례는 드물다. 역대 외국영화 흥행 성적을 보아도 '톱10' 안에 든 작품 중에 정통 추리물은 없다. 케네스 브래너 감독(58)의 영화 '오리엔트 특급 살인'도 예외는 아니다. 관객 86만4617명을 모으는데 그쳤다. 이 숫자도 작지는 않다. 그러나 조니 뎁(55), 페넬로페 크루즈(44), 윌렘 대포(63), 미셸 파이퍼(60), 데이지 리들리(26) 등 할리우드 유명 배우들과 제작비 5500만 달러(약 588억3900만원)를 투입한 점을 감안하면 아쉬운 결과다. 패인(敗因)은 무엇인가?
나는 브래너 감독의 작품이 원작소설과 1974년 시드니 루멧 감독이 연출한 동명 영화를 기억하는 이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고 본다. 특히 포와로. 브래너가 연기하는 포와로는 얼굴에 기품이 넘쳐 정의로움은 부각되나, 특유의 매력은 반감됐다.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우유부단한 태도까지 보인다. 범인들을 찾아내고는 스스로 운명을 결정하라며 자신의 목숨까지 위험에 빠뜨린다. 자신의 삶을 사랑하고 사건에서 냉철한 면모를 드러내는 소설 속 포와로와 정반대다.
많은 이들은 이 영화가 원작에 충실해서 심심해졌다고 한다. 예를 들면 라쳇(조니 뎁)의 시체가 발견된 직후의 신. 포와로가 시체를 관찰하는 모습을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쇼트로 보여준다. 인물과 거리를 둠으로써 관객이 사건을 관찰자의 눈으로 보게 하려는 의도다. 하지만 이어지는 포와로의 면담 신들에서 카메라는 인물들의 감정에 휘둘린다. 편집에서 각 인물들의 회상도 삽입된다. 이 과정에서 반전을 갖춘 드라마의 힘은 증폭되지만 추리극의 매력은 반감된다. 원작에서 재미를 주는 주된 요인이 포와로의 작은 회색 뇌세포라는 점을 감안하면 아쉬운 선택이다.
특별한 기교 없이도 추리극의 주제의식은 분명하게 나타날 수 있다. 루멧 감독의 다른 작품 '12명의 성난 사람들'(1957)이 대표적이다. 배심원 열두 명이 친아버지를 나이프로 살해한 혐의로 구속된 열여덟 살 소년을 심판하기 위해 소집된다. 유일하게 무죄를 주장하는 데이비스(헨리 폰다)가 나머지 배심원들과 설전을 벌인다. 루멧 감독은 다양한 성격과 주장의 충돌로 긴장을 유발하며 사건의 본질에 다가간다. 치열한 흔적은 이들이 퇴장한 뒤 비춰지는 책상에서 단번에 나타난다. 메모한 종이와 담뱃재떨이, 신문, 휴지 등이 너저분하게 흐트러져 있다.
배심원들은 주체적으로 사고하는 듯하나, 알고 보면 특정 상황에 끌려 다닌다. 주관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때 묻지 않은 인간이기에 같은 상황에서 비슷한 행동 패턴을 보일 뿐이다. 자주적 사고가 조금 부족해도 인간다움을 잃지 않았기에 무죄로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오리엔트 특급 살인에서 강조하는 가치도 휴머니즘이다. 알고 보면 따뜻한 내면을 간직한 이들의 범죄. 크리스티는 소설에서 이와 비슷한 사건들이 진정으로 용서받을 수 있느냐고 묻는다. 독자나 관객이 판단하는데 구구절절한 사연은 포와로의 면담만으로 충분하다. 그의 지팡이와 콧수염이 희생, 용서 등의 가치로 거듭났듯 관객에게도 충분히 숙고할 기회를 주어야 했다.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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