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정확히 그 정곡을 콕 집어낸 말이 있을까? 이 말을 처음 들었을 때의 통쾌함이 지금도 기억난다. 그건 그 당시 내 처지가 갑이 아닌 을이었기 때문인데 모르긴 해도 을의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라면 모두 나처럼 이 말에 왠지 모를 해방감과 서글픔을 느꼈을 것이다.
최근 우리사회에서 갑을 관계의 역학을 바꾸려는 실질적인 노력들이 시도되고 있다. 얼마 전 매스컴을 떠들썩하게 했던 공관병 문제도 그 중 하나이다. '장군과 사모님' 이야기는 아주 오래전부터 들어왔으니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지만 그 장군과 사모님이 누구인지 바로 이름이 거론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기에 많은 사람들의 공분을 샀다.
불교계에서는 공관병에게 교회 출석을 강요했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 분개했다. 하지만 나를 더 놀라게 한 것은 그 '사모님'의 변명이었다. 왜 공관병을 노예처럼 부렸냐는 질문에 "아들 같아서"라고 대답했다는 기사를 읽고 나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물론 자신의 아들에게 그런 일을 시켰을 리 없을 테지만, "아들 같아서"라는 말이 자신이 한 일에 대한 변명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것이 놀라웠다. 백번을 양보해서 정말 아들이라면 노예처럼 부리고 자기의 종교가 아닌 다른 종교를 강요해도 괜찮은 걸까?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 역시 그러하다. 자식들이 그들의 뜻대로 해주기를 바라는 것 역시 폭력이 아닌가. 자식의 인격이나 그들의 내면성을 존중하지 않는 것 역시 사랑을 빙자한 폭력이 아닌가. 도를 넘는 사랑은 모두 그렇게 폭력이 되기 쉽다. 자식이 좋은 대학을 가기 바라는 것도, 좋은 직장을 얻길 바라는 것도 자식들에게는 폭력과 억압이 될 수 있다. 더구나 종교는 가장 깊은 내면성의 형식이다. 그것을 바꾸려는 것은 그 사람을 부정하는 것이다. 자식이든, '자식 같은' 공관병이든 그들의 종교마저 마음대로 하는 것은 아무리 변명해도 폭력이다.
명법스님 은유와마음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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