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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터삶터] 고사리에 담긴 향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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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대 동국제강 상무

김종대 동국제강 상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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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 파주 어머니 집에서 하루 밤 지냈다. 전원마을의 새벽 공기는 무척 차가웠다. 앞마당 화단은 여름을 쓸어간 가을의 뒤끝처럼 스산했다. 구순 노모의 유일한 일거리이며, 남은 여생을 동무하는 채소와 과실나무도 찬 날씨를 힘겨워했다. 호박잎도 축 늘어지고, 아직 따지 않은 고추도 간신히 매달려 있었다. 저만치 멀지 않은 앞산 잡목도 갑자기 단풍이 들었다.항아리에 받아놓은 빗물은 손이 시릴 정도로 차가워, 자칫 노모가 채소밭에 물을 주시려다 소스라치게 놀라실까 걱정이 앞섰다. 공연히 하늘을 향해 입김을 불어 보았다. 담배 연기 같은 하얀 입김은 이내 사라지고 차가운 기운만 무겁게 사방을 깔고 앉아 있다.

  제비는 벌써 종적을 감췄다. 밭 벌레소리도 어쩌다가 하나 둘 들릴 뿐이다. 꼬리치며 달려들던 이웃 집 흰 강아지도 제집에서 머리꼭지만 내밀고 있었다. 이런저런 풍광들은 오랜만에, 온몸으로 느껴보지만 분명한 것은 완연한 겨울이라는 점뿐이다. 농사일 전혀 모르시던 노모는 한국에 돌아오신 이후로 밭을 꾸미시고 일거리를 만드셨다. 어머니는 챙이 긴 모자와 보자기를 머리에 둘러쓰고 냉이를 캐시면서 봄을 맞으셨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이라는 음절을 반복하여 흥얼대시며 즐거워하셨다. 아마 소녀 시절을 회상했을 것이다. 호박, 오이, 고추, 깻잎을 한 보따리 챙겨 주시던 여름과 가을의 기억도 겨울이 몰고 가버렸다. 겨울은 추워서 밉다. 들판을 휩쓸고 간 겨울은 더욱 싫다.
  밉다 밉다 했더니 고깔모자 쓰고 "이래도 밉소" 했다던 옛날 얘기처럼, 앙상한 가지에 두서너 개 열매를 매달은 땡감 나무가 '나 여기 있소' 하면서 미운 얼굴을 내밀고 있는 것도 추운 겨울이 왔음을 알리는 전조였다.

어머니는 두 가지 일을 즐겨 하신다. 마땅히 하실 일도 없고, 이웃 마실도 즐겨 하지 않으신다. 30여년의 오랜 외국생활 탓에 친구 분도 없을 뿐더러 설사 말동무가 있으셔도 문화 차이가 커서 그런지 혼자 소일 하는 걸 좋아하신다. 3평 남짓한 앞마당에서 이름 모를 들꽃과 화초, 그리고 그 옆에 고랑을 내서 채소를 키우시는 일이 마냥 즐거우신가 보다. 어둠이 내리면 손뜨개질로 하루를 마감하신다. 아들, 며느리, 손주에게 주려고 털로 짠 양말을 만들고 계신다. 당신이 죽고 난 이후에 엄마의 추억과 할머니를 기억해 달라는 무언의 몰입이었다. 지난여름, 아주 뜨거운 여름날 밤에 어머님은 독백처럼 노래를 하셨다.

  "심산고사리, 바람에 도르르 말리는 꽃고사리!
  고사리 순에사 산짐승 내음새, 암수컷 다소곳이 밤을 새운 꽃고사리!
  도롯이 숨이 죽은 고사리 밭에, 바람에 말리는 구름길 팔십리."
  무슨 노래냐고 몇 번이나 반복하여 물었어도 대답이 없으셨던 어머니는 마지못해 '운복령'이라고 하셨다. 나도 잘 모르는 박목월 시인의 시 구절을 하나도 빼지 않고 기억하시는 모습에 다소 놀랐지만 어머니의 삶속에 담긴 고사리는 타향살이 30여년의 향수였다.

  7~8년 전 한국에 오셨을 때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말린 고사리를 한 봉지씩 나눠 주셨다. 한국 야시장에 지천으로 널린 고사리를 귀한 선물인 양 건네받은 우리 형제들은 다소 실망했지만 오래지 않아 자식과 고향을 그리워하는 어머니의 향수임을 알아챘다.

  "독일서 교민들과 소풍을 갔는데 글쎄 야산에 고사리가 엄청 많은 거라. 퍼뜩 피란 시절이 생각났지. 새끼들 먹이려면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거두었던 일이 생각나서 고사리를 모조리 뜯어다가 여름 내내 말렸다"는 후일담이다

  당신의 손으로 직접 캐서 다듬고, 햇볕에 이리저리 뒤집고 말리면서 고국에서 자식들과 조우할 때 고사리 무침을 해서 먹이겠다는 어머니의 소박한 마음은 한국의 옛날 향수가 서려 있는 모정이었다.

  서울과 파주, 불과 30여Km에 불과한 거리이지만 자주 뵙지 못하는 죄송함이 오늘따라 크게 느껴지는 것은 찬바람이 안겨주는 막연한 걱정 때문이다. "어머니! 이렇게 부르면 지체 없이 격렬한 전류가 온다. 아픈 전기이다. 아프고 뜨겁고 견딜 수 없는 전기이다." 김남조 시인의 <그 먼 길의 길벗>이 지금의 필자 마음뿐일까. 겨울이 되면 이렇게 마음이 짠해진다. 이번 주말에도 어머니 집에서 된장찌개로 오붓한 저녁을 맞아야겠다.

김종대 동국제강 상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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