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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 의에 목마른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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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두환 정권이 한창 위세를 떨치던 5공 시절, 파출소 현관 이마에는 어디에서나 잘 보이게 '정의사회 구현'이라는 간판이 큼지막하게 붙어 있었다. 밤에도 형광등이 환히 켜져 있어 어디에서나 쉽게 눈에 잘 띄었다. 정의사회구현…. 얼마나 좋은 말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간판을 볼 때마다 옛날 불량배들의 팔뚝에 시퍼렇게 문신처럼 박혀 있던 '정의'라는 말이 자꾸 떠올랐던 것은 웬일일까? 그러고 보면 같은 단어라도 하는 사람에 따라, 또 시절에 따라 그 어감이 얼마나 달라지는지 알 수가 있다. 마치 '국민행복시대'의 행복이란 말처럼…. 폭력과 반칙, 온갖 특혜와 비리가 난무하던 그 시절 그때의 그 간판은 차라리 불량배의 그것보다 더 희극적으로 보였는지 모른다. 때때로 정의란, 아니 아주 자주 정의란, 강자의 입맛에 맞추어져 온 것이 역사이기도 하다.

 몇 년 전 하버드 대학 철학 교수인 마이클 샌델이 쓴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베스트셀러에 오르면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적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다소 어려운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EBS에서 수차례에 걸쳐 방영한 그의 강좌는 많은 청중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서양의 학자답게 논리적이고 분석적인 방법으로 '정의'에 관한 여러 철학적인 해석을 소개하고, 나름대로 결론을 내고 있다. 이를테면 공리주의를 설명할 때 '난파선에 타고 있던 네 명의 선원이 살아남기 위해 최후로 병들고 고아인 열일곱살의 소년을 잡아먹었다. 그것은 과연 정의에 적합한가, 아닌가' 하는 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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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우리는 그런 학자들이 정의를 분석적으로 접근해 정의(定義) 내리기 전에, 훨씬 전에, 이미 정의라는 말을 알고 있었고, 사용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우리 동양에서만 해도 유교에서는 인간이 인간다워지기 위한 덕목으로 첫째 사랑, 둘째로 정의, 셋째는 예의, 넷째로 지혜를 들고 있지 않은가. 말하자면 인의예지(仁義禮智)라 부르는 사단(四端)이 바로 그것이다. 이 사단과 희로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慾)의 칠정(七情)이 바로 인간의 본성을 이루는 기초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여기서 정의, 곧 의로움의 뿌리는 바로 수오지심(羞惡之心), 곧 부끄러움을 아는 것이니 사람이 사람다운 꼴을 가지려면 부끄러움을 가져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덕목은 누가 가르쳐주거나 심어준 것이 아니라 인간의 꼴을 하고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본래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사기나, 도적질, 거짓말이 나쁜 것은 그러한 인간의 본성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의에 대한 가르침 중에서 가장 가슴 깊이 다가오는 것은 뭐니뭐니 해도 예수의 가르침일 것이다. 그는 굳지 그렇게 정의에 대해 정의를 내리려고 하지는 않았지만 누구나 알 수 있게 정의를 설파하였다. 바로 산상수훈이라 불리는, 갈릴리 호숫가의 작은 언덕에서 로마 식민지 치하에서 고통 받고 있던 가난한 자기 민중들을 향한 설교에서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로 시작하는 그 네 번째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하고 그는 말씀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더 이상 설명을 요하지 않는 말이다. 공리주의니 자유주의니 하는 철학적 논쟁도 공허하게 들려올 뿐이다. 그것은 인간이 생리적으로 느끼는 배고픔과 똑같이 실존적인 것이다. 정의사회구현과 같이 힘 있는 자의 아전인수 겉치레 말도 아니요, 그저 해보는 엄살도 아니다. 차라리 절체절명의 한이 배인 절규에 가깝다.
 지금 우리 한국 사회는 정의가 송두리째 무너져 내린 지 오래이다. 억울한 죽음들이, 그들 가족들의 울음소리가 그치질 않는다. 세월호의 어린 죽음은 어쩌며 물대포에 맞아 쓰러진 농민 백남기 선생의 죽음은 어쩔 거나. 가습기 살균제에 죽어간 어린 목숨은 어쩌며 하루도 그치지 않는 수많은 자살자들의 억울한 목숨은 또 어쩔 것인가. 이를 외면하고 무시한 채 우리는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 없다. 우리 모두가 진정으로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먼저 이들의 눈물부터 닦아주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정의이기 때문이다.

 김영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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