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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한詩] 세일극장/허연

최종수정 2016.07.15 15:33 기사입력 2016.07.15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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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 후배였던 혼혈 아저씨가 영사 주임으로 있던 극장. 세일극장에 가면 멋진 생이 있었다. 어른들은 오징어에 소주를 마시고 난 영사실 책상에 걸터앉아 영화를 봤다. 은하철도처럼 환하게 어둠을 가르고 달려가 내 생에 꽂혔던 필름. 난 두 평짜리 영사실에서 한 줄기 계시를 받고 있었다. 그런 날이면 빨간 방울 모자를 쓴 여주인공과 계단이 예쁜 도서관엘 가기도 했고, 윈체스터 장총에 애팔루사를 타고 황야를 달리기도 했다.

 필름 한 칸 한 칸에 담겨 있던 빗살무늬토기의 기억. 토기를 뒤집으면 쏟아지던 눈물들. 어느 날은 영웅이 되고 싶었고, 어느 날은 자멸하고 싶게 했던 날들. 문틈으로 들어온 빛이 세상을 빗살무늬처럼 가늘게 찢어 놓은 곳. 낡은 자전거 바퀴 같은 영사기가 힘겹게 세월을 돌리던 곳.

 난 수유리 세일극장에서 생을 포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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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한詩] 세일극장/허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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