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내게는 돈이 없었다. 필동에 있는 '이층집'(단골 식당 또는 술집)에서 소주를 한 잔 하면 집에 갈 차비조차 없을 터였다. 나는 터덜터덜 걸어서 덕성여대 근처에 있는 작은 극장을 찾아 갔다. 담배를 피우며 연극이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지금도 이 연극을 생각하면 배고픔과 쓴 담배 맛이 떠오른다.
'건축가 부부' 노은주ㆍ임형남은 지난해 10월 '골목 발견' 연작의 일부로 운니동 골목을 다룰 때 이렇게 썼다. "1970년대 우리나라에는 연극이 문화의 상징이고, 정기적으로 연극을 보지 않으면 지성인으로서 결격이 되는 듯한 묘한 분위기가 있었다. (중략) 영화보다 훨씬 비싸고 내용도 어려웠는데도 많은 사람이 몰려갔다."
나는 1983년 5월 13일에 추송웅의 모노드라마를 본 뒤 연극에 빠져들었다. 그는 모교의 중강당에서 '우리들의 광대'를 공연했다. 봄 축전 행사의 일부였다. 추송웅은 신들린 듯 연기했다. 엄청난 에너지로 무대를, 소란하기 짝이 없던 그 큰 공간을 완전히 장악해 버렸다.
주호성(66)이 '빨간 피터'(23일~4월3일ㆍ예그린시어터)를 공연한다는 소식에 대뜸 추송웅을 떠올렸다. 그래서 '가수 겸 탤런트 장나라(35)의 아버지인…'으로 시작되는 신문기사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도 보러 간다. 배우의 연기가 훌륭했으면 좋겠다. 그래야 원작자와 작품, 먼저 전설을 남긴 대배우에 대한 예의를 다할 수 있다.
이태 전 여름, 독일로 출장을 가 도서관을 몇 곳 방문하고 자동차를 운전해 오스트리아로 넘어갈 때 보덴제를 지났다. 프라이부르크를 떠나 인스브루크로 가는 길이었다. 아내와 함께 갔다. 한여름 태양 아래 물결이 반짝였다. 자동차를 세우고 오랫동안 호수를 내려다보았다. 그때 대학생 시절에 본 연극과 추송웅을 떠올렸다. 아내에게 말했다.
"다시 오자. 허리까지 눈이 쌓인 추운 겨울 밤, 이곳 어딘가에서 길을 잃고 작은 주막에 들러 며칠이고 보덴제를 내려다보자"고.
조명이 쏟아지는 무대는 한 공간을 넘어 세계로 확장한다. 그럼으로써 배우 뿐 아니라 관객을 그 세계에 가둬 버린다. 명작이 강요하는 그 황홀한 고립은 시간과 세대를 뛰어넘어 실재하게 마련이다. 그렇기에 그 해 여름 나의 다짐은 빨간 피터와 광대, 배고팠던 저녁의 기억과 더불어 언제나 현재로서 내게 남아 있다. huhb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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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직장 잃을 위기에 놓였다…한국 삼킨 초저... 마스크영역<ⓒ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