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에디터 칼럼
인공지능이란 말 앞에 붙은 인공(人工)은 '인간이 만든 것'이라는 의미로, 창조자의 자부심이 깃들어 있다. 영어로 쓰인 artificial도 마찬가지다. 인간과 인간이 만든 것 사이의 대결은 인간문명의 역사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이동속도를 이긴 마차와 자동차의 역사, 날개 없는 인간을 이긴 비행기의 역사, 샘물에 목을 축이던 인간을 이긴 댐과 상수도의 역사, 태양의 빛을 즐기던 인간을 이긴, 수많은 빛들의 역사, 인간 체력의 수많은 약점을 이긴 기계, 기계들. 인간의 계산능력을 이긴 컴퓨터의 발명, 인간의 사회생활을 뒤바꾼 네트워크. 이 모든 것이 인공의 대약진을 말해주는 우렁찬 사례들이다.
알파고에 대한 경탄과 조롱은 사실 같은 심사에서 나오는 다른 반응이다. 78번수 이후에 인공지능이 뻘짓을 한 자취들은 이세돌을 비롯한 인간들을 기분 좋게 할 만한 황당한 서비스였다. 알파고가 의도한 것은 아니더라도 인간의 비범한 통찰에 나가떨어진 기계의 지능을 바라보는 일은 인간 존재 전반의 값어치를 고양시키는 기분을 줬기 때문이다.
알파고라는 기계는 왜 무서운가. 지능이 뛰어나서가 아니다. 지치지 않아서도 아니며 연산속도가 빨라서도 아니다. 그의 능력이 지닌 경쟁점의 핵심은 '학습'이다. 알파고는 인간의 바둑을 학습해서 인간과 대적한다. 어마어마한 양의 데이터를 입력시켜 그 중에서 가장 적합한 수를 찾아내는 것이다. 인간도 학습을 하지만, 그만큼 많이 그만큼 빨리 학습할 수는 없다. 그리고 인간의 판단 정보는 경험과 계산과 영감으로 이뤄지지만, 인공지능의 판단은 승리의 종점을 정해놓고 매번 두는 수마다 거기에 최적화된 한 수를 찾아낸다. 그 판단은 틀릴 수가 없다. 인간은 바둑 전체를 미리 두어보면서 한 수 한 수를 두는 것이 불가능하다.
알파고의 학습이 무서운 것은, 인공지능의 향후 진화방향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자랑해온 고도화된 지적 작업 중에 '학습'이 해결할 수 없는 것이 있었던가. 인간의 모든 지적 능력의 총체는 오로지 '학습'의 좋은 결과가 아니었던가. 정치인들이 인공지능을 달고 정치한다면? 경영자들이 인공지능을 달고 기업을 경영한다면? 군인들이 인공지능을 달고 전투를 벌인다면? 신문기자들이 인공지능을 달고 취재를 하고 기사를 쓰고 논설을 쓴다면? 우린 '알파고'보다 빨리 혹은 많이 학습해서 그 경쟁자를 이길 수 있을까. 우리의 자리는 과연 남아 있을까. 이것이 '알파고 우울증'이 생긴 문제의 핵심이다. 학습하는 지능은 지금 현재의 능력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어떻게 진화할지 아무도 모르는 것에 그 공포의 실체가 있다.
이상국 기자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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