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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동여담]비문(非文)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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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文)이 태어나던 날, 세상의 혀들은 자신들의 제삿날이 온 줄 모르고 있었다. 매머드 같은 거대한 형상으로 문이 온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돌덩어리 한 모퉁이에, 쇠솥 한 귀퉁이에 한 글자 한 글자 가만히 적혔다. 처음부터 글자도 아니었다. 익숙한 형상들을 흉내낸 소박한 그림(상형문자)들로 들어와 조금씩 제 모양을 바꾸어갔다. 혀들의 세상을 잠식한 문(文)은 갑작스레 일제히 봉기하지 않았고 막사나 궁궐을 엄습하는 쿠데타도 없었다. 어느 날 시장통에 얹혀있던 종이가, 그 옆가게 담비털을 묶은 붓, 그 뒷가게 검은 흙을 으깨 말린 먹과 만나면서 반란의 음모가 시작되었다. 붓이 먹을 먹고 종이가 그 자취를 보쌈해 사람들에게 퍼나르기 시작했다. 책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이천년 인간의 영혼을 점령하고 문명(文明)을 밝혀온 그 작고 연한 것들. 감동은 붓끝에 있었고 권위는 먹향기에 있었고 슬픔 또한 벼루를 갈면서 터져나왔다. 문의 정상에는 옛 노래의 뼈를 나꿔챈 시(詩)의 깃발이 나부끼고 있었고, 역사와 법전과 교과서가 인간의 골목을 누비며 거시와 미시의 밭고랑을 갈고 있었다.

2000년 비문(非文)이 태어나던 날, 세상의 문(文)들은 자신들의 제삿날이 온 줄 모르고 있었다. 매머드 같은 거대한 형상으로 비문이 온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자주 먹통이 되던 PC통신과 난삽한 인터넷 홈피로, 전화기 속 사진 몇장과 짧은 동영상으로 조금씩 조금씩 가만히 피어올랐다. 처음부터 비문도 아니었다. 그 속에는 문자가 여전히 중심을 이루고 있었고 문장은 짧아졌지만 음전한 문의 기풍은 살아있었다. 비문의 세상에 들어온 문(文)의 충성스런 신하들이 여전히 문을 일구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文)은 그 안에서 조금씩 스스로를 혁신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비문을 수용하려는 문의 필사적인 변신들이었다. 갑자기 혀로 퇴행하기 시작하는 징후도 있었다. 글에 죽어지내던 혀가 살아나 '말하는 것처럼 쉽고 짧게 글을 쓰라'고 명령하기 시작했다. 인터넷과 전화, 그리고 스마트 기술이 결합하면서, 비문(非文)들의 권력은 커지기 시작했다. 영화와 동영상, 소리들이 공간과 시간의 제약을 극복하면서 문(文)이 지니고 있던 절대적인 효용들은 값이 뚝 떨어졌다. 문(文)은 혀를 움직이지 않아도 되어 감정소모를 줄일 수 있는 소통 방식(문자메시지처럼)일 뿐 그 밖의 장점은 없어보였다. 문인들은 밥벌이를 걱정하며 재능을 리모델링하는 방법을 찾아나섰고, 문학은 딱 그자리에 멈춰선 채 죽어가는 제 꼬리를 들여다보고 있는 중이다. 출판은 난파선 위에서 구명보트를 내리고 있다. 한쪽에서는 '문을 살리자' '도서관을 살리자' '이 무식한 사람들아 책을 좀 읽어보세요'를 외치며 피를 토한다. 또 다른 쪽에서는 문(文)의 독립을 접고, 게임이나 영화 쪽과 입을 맞춰 생계를 도모하기도 한다. 책을 내는 저자(著者)들이기도 했던 학자들과 강연클럽을 만들어 강의동영상을 네트워크를 활용해 상품화하는 야심찬 아이디어를 내는 출판사 사장도 있다.

비문(非文)은 문장 구성을 제대로 갖추지 못하는, 초보적 결함을 지닌 글쟁이를 힐난하는 말이었다. 생각은 진화하여 할 말은 많아졌지만 그것을 조리있는 글로 표현하지 못하는 문자언어 장애인들. 그들은 비문(非文)콤플렉스에 오래 고통받아왔지만 이젠 그럴 필요가 없게 된 듯 하다. 세상이 비문으로 가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의 소통이 온통 비문이기 때문이다. 문장의 체계를 강조하던 때는, 문(文)의 서슬과 경배가 아직 살아있을 때였다. 이젠 대충 쓴 오문(誤文)도, 아무렇게나 휘갈긴 난문(亂文)도, 주어와 술어가 따로 노는 비문(非文)도, 군색해서 보기에도 답답한 졸문(拙文)도, 오만하고 이기적인 망념들로 가득한 오문(汚文)도, 번잡하고 내용없는 허문(虛文)도 아무런 제동 없이 횡행한다. 그걸 옮기는 네트워크가 너무 빨라지고 좋아졌기 때문이다. 문자에 밝은 이가 냉큼 달려들어 꾸짖고 단속하며 바로잡던 기풍은 휘발한지 제법 됐다. 아직도 먹물이 덜 빠진 문의 후예들은, 이 굴욕과 광기의 비문을 오물 퍼마시듯 들이마시며, 이대로 살아야 하나 아니면 제대로 전향해서 문의 영혼을 팔고 "비문도 문이다"며 찬가를 부르며 나아가야 하나 거듭거듭 눈알을 굴리고 있는 중이리라.



이상국 편집부장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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