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 선거는 먼 나라 이야기처럼 들릴지 모른다. 우선 지난해 런던올림픽에서 있었던 일화 한 토막. 우리나라는 대회에서 유난히 이런저런 피해를 많이 봤다. 수영의 박태환, 펜싱의 신아람, 축구의 박종우 등이다. 대회 뒤 대한체육회 회장은 국회에 출석해 스포츠 외교력을 심판받았다. 그때 ‘좀 안다’하는 분의 말에 글쓴이는 귀를 의심했다.
“현지에 있던 IOC 위원들은 도대체 뭘 하고 있었습니까.”
IOC는 1894년 6월 23일 설립을 결정하며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정치권의 개입을 철저히 막았다. 국적과 종교, 지역을 초월한 권위를 스스로 만들었다. 2013년 현재 102명의 IOC 위원을 대표하는 위원장은 말하자면 ‘스포츠 세계 대통령’이다. IOC 창립 당시 위원은 총 13명이었다. 이 가운데 유럽 국적이 아닌 위원은 3명(미국 아르헨티나 뉴질랜드). 나머지는 이탈리아, 그리스, 제정러시아, 영국, 오스트리아-헝가리, 프랑스(2명) 노르웨이-스웨덴, 보헤미아 출신 등의 유럽 출신이었다. 애초 올림픽 운동(Olympic Movement)을 유럽이 주도했다고 할 수 있다.
제1대 데미트리우스 비켈라스(그리스)부터 현 위원장인 자크 로게(벨기에)까지 8명의 IOC 위원장 가운데 비유럽 출신은 제5대 에이버리 브런디지(미국)뿐이다. 1952년 스웨덴 출신인 요한 지그프리드 에드스트롬으로부터 바통을 넘겨받은 브런디지는 이에 앞서 미국올림픽위원회(USOC) 위원장을 맡고 있었다. 브런디지의 USOC 위원장 전임자는 우리가 잘 아는 더글러스 맥아더다.
지난 25일 선거 출마자는 5명으로 늘었다. 조정 선수로 1968년 멕시코시티 대회부터 3회 연속 올림픽에 출전한 스위스의 데니스 오스왈드 위원이 소매를 걷어붙였다. 토마스 바흐(독일) 부위원장, 리처드 캐리언(푸에르토리코) 재정위원장 등과 경쟁을 벌일 예정. 우크라이나의 세르게이 부브카 위원까지 뛰어들면 이번 위원장 선거는 전례 없던 치열한 선거가 될 것이다. 선거는 무기명 비밀투표로 진행되는데 출석 위원 과반 득표자가 나올 때까지 계속된다. 참석 추기경의 2/3 이상 득표자가 나와야 하는 교황 선출 방식만큼은 아니지만 꽤 까다로운 방식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IOC 위원장은 요즘 말로 ‘스펙’이 어느 정도 돼야 할까. 3개월 보름여 뒤 물러나는 로게 위원장의 경력을 살펴보자. 벨기에 출신인 그는 대학에서 의학을 전공했다. 요트 선수로 1968년 멕시코시티 대회와 1972년 뮌헨 대회 그리고 1976년 몬트리올 대회 등 3차례 연속 올림픽에 출전했는데 럭비 선수로 활동하기도 했다. 대학을 졸업한 뒤 겐트종합병원 정형외과 과장으로 일하며 브뤼셀의 리브르대학교에서 스포츠 의학을 강의한 로게 위원장은 1991년 IOC 위원에 선임됐다. 1989년부터 3년 동안 벨기에올림픽위원회 위원장을 지냈으며 IOC에 몸담은 뒤에는 의무분과위원회에서 약물 퇴치 운동에 앞장섰다. 1994년엔 의무분과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았다. 그리고 2001년 7월 16일 모스크바 IOC 총회에서 올림픽의 규모 축소, 약물 추방, 인간성 회복 등을 공약으로 내걸고 IOC 위원장으로 선출됐다. 구사하는 언어는 총 다섯 가지로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네덜란드어다.
요트 선수 출신(1969년 동남아시아경기대회 은메달)인 능 세르 미앙 위원(2010년 하계 유스올림픽조직위 위원장)과 학창 시절 잠시 농구를 했다는 우징궈 위원(국제복싱협회 회장)이 IOC 위원장 선거에 나선단 소식을 접하면서 “우리는 언제나”라는 생각이 든 건 비단 글쓴이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신명철 스포츠 칼럼니스트
이종길 기자 leem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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