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의 얼굴인 엠블럼이 지난 3일 공개됐다. 상징은 한글 ‘평창’에서 ‘평’의 초성인 ‘ㅍ’과 ‘창’의 초성인 ‘ㅊ’을 모티브로 형상화했다. 우리나라에서 열리는 동계 올림픽에서 한글의 우수성을 알릴 수 있다는 사실이 좀처럼 믿어지지 않는다. 동계 올림픽 출전 역사를 돌이켜보면 더욱 그렇다.
한국이 처음 참가한 건 1948년 생모리츠(스위스) 대회. 출전 선수는 스피드스케이팅의 3명이 전부였다. 여자 선수(김경회, 한혜자)가 처음으로 나선 1960년 스쿼밸리(미국) 대회부터 2010년 밴쿠버(캐나다) 대회까지 한국의 동계 스포츠는 꾸준히 성장했다. 특히 처음 메달을 얻은 1992년 알베르빌(프랑스) 대회부터 18년 동안 기량 발전은 가속화 단계를 밟았다. 한국 특유의 압축 성장이었다.
일제 강점기를 비롯해 1960년대까지만 해도 우수 선수들은 주로 한반도 북쪽 지역에서 많이 나왔다. 1960년대 북한 스포츠를 살펴보면 육상경기에는 신금단, 빙상경기에는 한필화가 있었다. 북한은 1964년 인스부르크(오스트리아) 대회 때 처음으로 동계 올림픽에 출전했는데 당시 한필화는 스피드스케이팅 여자 3000m에서 소련의 리디야 스코블리코바에 이어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북한은 이 대회에 스키 4명(남 2 여 2), 스피드스케이팅 9명(남 4 여 5)의 적지 않은 선수단을 파견했다. 한국은 7명이었다.
그해 도쿄에서 열린 하계 올림픽에서 북한이 선수단 호칭 문제를 트집 잡아 대회를 보이콧하지 않았다면 세계 최고 수준의 경기력을 갖고 있던 신금단은 중거리에서 최소 1개 이상의 금메달을 딸 수 있었다. 그 무렵 북한은 동·하계 종목에서 모두 상당한 수준의 경기력을 자랑했다.
그렇다면 그 시절 서울에 있는 한강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 조선체육회는 1927년 1월 한강에서 주최할 예정이던 제2회 전조선빙상경기대회를 열지 못했다. 불발은 1928년 1월에도 거듭됐다. 높은 기온으로 경기를 하기에 알맞은 두께의 얼음이 얼지 않았던 까닭이다. 1929년 1월 조선체육회가 한강에서 열 예정이던 전조선빙상경기대회도 같은 이유로 열리지 못했다. 지구 온난화가 지금처럼 심화되기 전이지만 한반도 중부 지역에선 80여년 전에도 1월에 빙상경기를 할 수 없었다.
아이스하키와 피겨스케이팅을 할 수 있는 실내 링크가 서울 동대문에 들어 선 건 1964년의 일이다. 그러나 이 링크는 경영난으로 1980년 문을 닫았다. 바닥에 얼음을 얼리는 시설을 깔아 겨울철에만 제한적으로 스피드스케이팅을 할 수 있는 400m 트랙의 국제 규격 경기장이 태릉선수촌에 건설된 건 1971년의 일이다.
그렇게 겨울철 종목 후진국이었던 나라가 이제 5년 뒤면 동계 올림픽을 개최한다.
신명철 스포츠 칼럼니스트
이종길 기자 leem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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