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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 산책]설날의 추억과 '푸어 풍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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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녘이었던 것 같다. 갑자기 꽹과리와 장고, 북소리가 왁자지껄 방문 안으로 파고들었다. 단잠에서 깨어보니 동네 어른들이 저마다 농악대 옷을 차려입고 마당으로 들어서 있었다. 어른들의 입에서는 연신 허연 입김이 퍼져나와 추위를 실감케 했다. 몸은 움츠러들었으나 신명나는 한때였다.

정월 초하루 마을 사람들이 한 마당에 모여 즐거움을 만끽하던 장면은 그렇게 기억 속에 있다. 그때 어른들의 행위는 풍년이 들기를 기원하는 의식이었다. 걱정없이 원만하게 농사를 지을 수 있게 합심하자는 맹세이기도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지난 한해동안 서로 논에 물을 먼저 대겠다며 티격태격 했던 응어리를 털고 마을의 공동체임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어려움을 함께 극복해내고 어울려 살아가겠다는 것을 말 대신 행위로 대신했다.
태어나고 자란 고향에서 그런 전통은 흔적없이 사라졌다. 아니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고작해야 과거의 10분의1도 채 되지 않는 사람들이 살고 있을 뿐이다. 누가 나서서 농악대를 조직하고, 무거운 악기를 들고 춤을 출 수 있을까. 누가 이들이 닥치면 음식을 차려내 맛보게 할 수 있을까. 여느 시골에서도 공동체 의식은 사라지고 그 기억만 희미하게 존재한다.

급속한 경제발전 속에 삶터는 대부분 도시로 옮겨져 있다. 그러나 도시에 시골의 공동체 지향의 커뮤니티 의식은 공간이동하지 못했다. 이렇다보니 모래알처럼 원자화된 개인들은 익명성 속에 숨어 바쁜 삶 속에서 날카로운 이빨을 쉽게 드러낸다. 성격 급한 운전자들끼리 신경전을 벌이다 결국엔 가까운 사람임을 확인하고 뻘쭘해졌다는 얘기들이 씁쓸하게 회자될 정도다. CCTV가 수십개씩 설치돼 있어도 범죄자들의 행위는 버젓이 이어진다. 나와 관계없음을 공격성의 근거가 된다고 보는 이들이 적잖은 셈이다. 공동체의식이나 배려의 마음가짐이 각박한 도시의 삶 속에서 사라졌음을 보여준다.

대표적인 한국의 주거형태이자 성냥갑으로 표현되는 아파트가 익명성을 키우고 그 '시골스러운 맛'을 사라지게 한다는 자조적 목소리가 적잖다. 출퇴근 시간이 다르고 직업 양태도 천차만별이어서 옆집과의 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 고작 위아래층간 소음문제로 겸연쩍은 신경전이 오가는 정도를 '교류'라고 볼 수 있을까. 자연스레 공동체 의식은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설 연휴 살인을 부른 원인이다.
이런 삭막한 흐름 속에서도 작은 변화는 있다. 셰어하우스(share house)가 도입되며 신선한 파장을 준다. 침실과 욕실은 개별적으로 두면서도 거실과 주방, 세탁실, 창고 등의 공간을 나눠쓰도록 계획한 집이다. 소형 주택에서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안부를 물으며 살 수 있도록 한 것이 특징이다. 저소득계층이 월세 10만원 수준으로 거주할 수 있어 '대안주택'으로 불릴만 하다. 1~2인 가구를 '수용'해 돈벌이를 해보겠다는 의도로 이곳저곳에서 때려짓는 도시형생활주택이 적잖으니 크게 비교되는 주택인 셈이다.

다행히 정부도 주택정책의 틀을 공급 위주에서 관리의 효율성으로 방향을 틀 것이라고 예고하고 있어 공동체 의식을 함양한 공동주택 문화가 만들어질 가능성은 있다. 주민들이 자율적으로 활동하는지, 주민 화합은 잘 이뤄지고 있는지, 사회봉사 참여도는 높은지 등을 평가해 우수 단지를 뽑기도 한다. 정부가 나서서 이런 평가를 한다는 것 자체가 미천한 주거문화를 드러내는 소치이긴 하지만 애써 노력한 부분을 격려해주는 행위는 긍정적으로 볼 수 있다. 주택이 투기나 투자의 수단이 아닌 주거의 수단으로 뿌리내릴 여건이 만들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한켠에는 여전히 수십만의 하우스푸어와 렌트푸어라는 살풍경이 주택시장에 도사리고 있다. 새 대통령을 중심으로 출발하는 차기 정부가 풀어가야 할 시급한 과제일게다. 수많은 푸어들의 문제를 풀고 정겨운 목소리가 오가는 주거문화를 만들어주기를 소망해본다.



소민호 기자 sm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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