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으로 기억한다. 글쓴이는 고려대를 졸업하자마자 상무에 입대했다. 군 문제 해결을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다. 야구 병행 때문만은 아니었다. 상무에선 국가대표팀 생활을 겸할 수 있었다. 그 덕에 글쓴이는 군인 신분에도 국제대회 참가를 위해 적잖게 외국 출장을 다녀왔다. 당시 프로선수들은 국제대회에 참가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주로 대학과 실업팀에서 실력을 갖춘 선수들이 가슴에 태극마크를 달았다.
그 시절 대표팀의 전력은 꽤 탄탄했다. 고 임수혁, 진갑용, 최기문 등이 안방을 책임졌고 박재홍, 심재학, 조경환, 안희봉, 김종국, 홍원기, 유지현, 이숭용, 허문회 등이 내·외야를 담당했다. 투수진 역시 만만치 않았다. 박찬호, 조성민, 임선동, 위재영, 손민한, 전병호, 차명주 등 빼어난 기량의 소유자들이 즐비했다. 이들과 함께했던 국제대회 가운데 아직도 기억이 생생한 건 한·미 친선 경기다. 대표팀은 미국 원정에서 치른 5경기를 모두 압승으로 매듭지었다.
당시 대표팀 선수 대부분은 각 구단의 1차 지명 대상자들이었다. 그래서 틈이 나는 대로 프로 입단을 준비했다. 박찬호는 달랐다. 하루 일과를 철저히 스스로 계획한 일정에 맞춰 움직였다. 특히 몸 관리에서 철저한 모습을 보였다. 운동을 마치고 숙소에 들어오면 늘 화장실 욕조에 찬물과 뜨거운 물을 받아 냉·온찜질을 여러 차례 반복했다. 욕조에 물을 받는 동안에는 팔굽혀펴기를 했다.
화장실을 나와서도 운동은 멈추지 않았다. 바로 고무튜빙을 집어 들고 어깨를 단련했다. 지칠 줄 모르는 열정에 글쓴이는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박찬호는 하루 일과를 본인이 챙겨온 한 달 이상 분량의 파스로 마무리했다. 어깨와 팔꿈치에 정성스레 붙인 뒤에야 잠을 청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 모든 것은 미국 메이저리그 진출을 위한 철저한 자기관리였다.
마해영 XTM 프로야구 해설위원
이종길 기자 leem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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