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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커스리더學]너그러운 선덕여왕, 신하·백성 품은 'W리더십'의 원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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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리더십 키워드 17-선덕여왕

-남자 성골없어 여왕자리에 올라
-폐위된 진지왕 손자 김춘추 발탁
-가야 출신 김유신에겐 군사권 맡겨
-삼국통일의 영웅들을 키워내

[포커스리더學]너그러운 선덕여왕, 신하·백성 품은 'W리더십'의 원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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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조슬기나 기자]"제 27대 선덕여왕. 성골 남자가 다했기 때문에 여왕이 즉위했다." <632년, 삼국유사>
"덕만(선덕여왕의 이름)은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며 총명하고 똑똑했다. 국인(國人; 화백회의를 일컬음)이 덕만을 세웠다. 성고황조(성스러운 혈통을 가진 여황제)라는 칭호를 올렸다." <632년, 삼국사기>
"봄 정월에 비담과 염종 등이 말하기를 '여자 임금은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없다'고 반역을 꾀해 군사를 일으켰으나 이기지 못했다." <선덕왕 16년, 삼국사기>

우리 역사에 여자왕은 세명이 있다. 신라의 선덕여왕, 진덕여왕, 진성여왕이다. 그 중 선덕여왕은 최초의 여왕으로, 진평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 16년간 나라를 다스렸다.

삼국사기에는 선덕여왕에 대해 '관인명민(寬仁明敏)하다'는 표현이 남아있다. 너그럽고 어질며 현명하다는 뜻이다. 그의 뛰어난 지혜와 혜안에 대해서는 여러 설화들이 전해진다. 인재 발탁과 배치에 능해 김춘추, 김유신 등을 등용했다. 첨성대와 황룡사 9층탑 등이 그의 재위시절 세워졌다.
삼국유사에는 선덕왕 지기삼사(선덕왕이 알아낸 세 가지 일)라고 해, 선덕여왕의 혜안을 알게끔 하는 설화들이 남아있다. 선덕여왕은 당나라 사신이 갖고 온 당 태종의 선물 중 모란꽃 그림과 씨앗을 보고 "이 꽃은 향기가 없다"고 언급했다. 후에 씨앗을 심어 꽃을 피우니 정말 향이 나지 않았다. 이에 신하가 어찌 알았느냐고 묻자 그는 "꽃 그림에 벌과 나비가 없으니, 향기가 없는 꽃이 아니겠느냐"고 말했다고 한다.

개구리 울음소리를 듣고 백제군의 침입을 맞춘 사건도 세 가지 일 중 하나다. 어느 겨울, 영묘사 옥문지에 개구리 수백마리가 사흘 밤낮을 울었다. 그러자 선덕여왕은 알천, 필탄 등에게 군사 2000명을 끌고 여근곡에 가면 백제군이 있을 것이니 그들을 섬멸하라고 명했다. 두 장군이 가서 보니 실제로 백제군이 매복하고 있었다. 백제군을 섬멸한 후 이를 어찌 알았는지 묻자 여왕은 "화가 난 개구리는 병사의 모습이고 옥문은 여자의 음부이며 여자는 음이고 음의 색은 흰색이며 흰색은 서쪽을 의미하니 군사가 서쪽에 있음이다"고 했다 한다.

또한 선덕여왕은 자신의 죽을 날을 미리 예언하고 부처의 나라인 도리천에 묻어 달라고 했다. 신하들이 이를 이해하지 못하자 그는 경주 낭산 정상이라고 알려줬다. 이후 문무왕이 삼국통일을 한 후, 낭산 아래 사천왕사가 창건되며 결국 선덕왕릉이 도리천에 위치하는 형국이 됐다고 한다.

이는 모두 그대로 믿을 수는 없는 단편적 설화에 불과하다. 하지만 선덕여왕의 지혜와 직관력이 매우 뛰어났고, 당시 신하와 백성들이 여왕을 신뢰하고 따랐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이 같은 설화는 모두 최초의 여성왕으로서 그의 자격이 충분함을 특별히 강조하려는 의도로도 읽힌다. 선덕여왕은 자신의 권위를 상징화하고 이미지화 할 줄 알았던 똑똑한 전략가였던 셈이다. 여기에는 불교도 적절히 이용됐다. 어지러운 국제정세를 풀 때 불교세력을 활용해 정국을 해결해나갔다. 그의 재위시절 세워진 사찰은 25개가량에 달한다. 유명한 황룡사 9층탑도 그의 작품이다.

첨성대 또한 선덕여왕 재위시 세워진 것이다. 관측건물을 세워 자연재해를 미리 예측하려 했던 것만 보더라도 그의 명민함을 알 수 있다.

선덕여왕은 인재발탁에서도 뛰어난 면모를 보였다. 적재적소에 훌륭한 인재를 배치해 국정을 돌봤다. 즉위 초에는 대신 올제가 국정을 맡았고, 그의 제부인 용춘은 훌륭한 자문인이었다.

김춘추와 김유신도 대표적인 선덕여왕의 측근이다. 폐위된 진지왕의 손자인 김춘추는 지혜와 화술, 국제감각까지 갖춰 당시 널리 알려졌던 인물이다. 남성 왕이었다면 이 잠재적 왕위 위협자를 가만히 뒀을리 없다.

멸망한 가야의 왕족출신인 김유신 또한 가야계라는 한계로 인해 배제되거나 견제받았을 것이다. 김유신에게 군사권을 맡기는 것은 파격적 인사였다. 선덕여왕은 능력만으로 사람을 평하고 합당한 지위를 부여해, 이들을 문무 양면에서 뛰어난 동아시아의 영웅들로 키워냈다.

자신을 흠모해 상사병이 든 지귀라는 역졸의 마음을 헤아려 영묘사에서 그와 만나주려 한 설화도 전해진다. 김유신이 김춘추와 관계를 가진 여동생 문희를 불살라 죽이려 했을때도 김춘추로 하여금 그녀와 결혼토록해 구해줬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는 모두 선덕여왕의 부드러운 리더십을 가늠케 하는 내용들이다.

632년 왕위에 오른 선덕여왕은 647년까지 왕위에 있었다. 통상 즉위 후 642년 대야성이 함락하기 전까지를 전반기, 후를 후반기로 나눈다.

진지왕의 손자인 김춘추는 왕실 내 유력한 남자 왕위계승권자였다. 그럼에도 선덕여왕이 왕위에 올랐다. 진지왕을 폐위시킨 세력의 반대가 컸음이 예상되는 대목이다. 이를 감안할 때 선덕여왕은 당시 정치판도에 의해 택해진 여왕이기도 하다.

선덕여왕이 왕위에 오르기 40년전인 593년 이미 일본에는 최초 여성천황인 스이코천황이 등극했다. 당시 신라는 일본과 교류가 많았을 당시다. 골품제의 원리에 의해 사회적 질서가 운영되던 신라로서는 진골 남자를 왕으로 추대하는 것보다 여성왕이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기 더 쉬웠을 것으로 보인다.

통치 후반기 정세는 불안했다. 재위 11년째던 642년 가을, 의자왕이 군사를 크게 일으켜 신라의 서쪽 성 40여성을 빼앗아 갔고, 그해 8월에는 고구려와 함께 당항성을 빼앗아 당나라와 통하는 길을 끊으려했다. 같은 달 대야성이 함락됐다.

선덕여왕의 리더십 한계도 여럿 지적된다. 지나치리만큼 종교중심적 행태를 보였다는 점과 측근위주의 통치 등이다. 그는 용춘과 김춘추, 김유신, 알천 등에 크게 의존하는 국정을 펼쳤다. 치세기간 외부 침략이 계속됐다는 점도 리더십의 약점으로 꼽힌다.

(도움말: 현대경제연구원)



조슬기나 기자 se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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