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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커스리더學]물벼락에 놀란 거란군, 매복군에 날벼락...강감찬 "전투는 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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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리더십 키워드-16. 귀주대첩

3차 침공 거란군, 새 공격루트 '개경직공'
퇴로 차단 후 바람과 비 이용 마지막 한방

[포커스리더學]물벼락에 놀란 거란군, 매복군에 날벼락...강감찬 "전투는 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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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조슬기나 기자]"국가에 장차 화패(禍敗)가 올 때에 반드시 명현을 내시어 이를 구하시는구나. 목종 말년과 현종 원년에 역신(逆臣)이 난을 일으키고 거란이 내습해 안으로는 내홍, 밖으로는 환란이 있어 국가가 위급한 지경에 이르렀는데, 만약 강공(姜公)이 없었더라면 장차 나라가 어찌 됐을지 알수가 없다."(고려사절요 中)
거란의 1차 침공은 993년, 3차 침공은 1019년이었다. 악명높은 거란의 기마군단을 물리치고 27년에 걸친 전쟁을 마무리한 것이 바로 그 유명한 귀주대첩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바로 강감찬(姜邯贊)이 있었다.

강감찬은 본래 문관(文官)으로 관직에 진출했으나 국난을 당하자 상원수(上元帥)로 전쟁터에 나가 뛰어난 지략과 탁월한 용병술로 거란의 10만대군을 물리쳤다.
고려 왕건이 죽은 지 6년째 되던 해인 정종 4년(949년) 태어나 35살의 늦은 나이에 벼슬살이를 시작한 그는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지략이 뛰어난 인물로 기록돼 있다.

고려사 열전에는 그에 대해 "성품이 청백하고 검소하며 자신의 재산에 관심이 없었다. 체격이 작고 용모가 보잘 것 없었으며 평상시에는 해지고 때 묻은 옷을 입고 있어 누구나 그를 보통사람으로 봤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그가 엄숙한 태도로 국사를 처리하고 국책을 결정할 때는 당당한 국가의 중신으로서 역할을 다했다. 당시 풍년이 계속되고 백성들의 생활이 안정돼 나라가 평온한 것을 사람들은 강감찬의 공으로 여겼다"고 한다.
세종실록과 동국여지승람에는 이 같은 일화가 남아있다. 강감찬이 조정서 벼슬을 할 때 송나라 사신이 고려에 왔다 강감찬을 보더니 자리에서 내려 절을 올리며 "문곡성(文曲星)을 못본지 오래 됐는데 지금 여기서 뵙습니다"고 했다고 한다. 문곡성이란 도가에서 말하는 9성 중 넷째로 학문을 주재하는 별이다. 강감찬이 학문을 좋아하고 문장력이 뛰어났다는 의미로 나온 이야기다.

또한 고려사 열전에 따르면 현종이 그를 서경유수 내사시랑 동 내사문하평장사(문하평장사는 오늘날 부총리격)로 임명할 당시, 임명장 여백에 "경술년 중 오랑캐 무리가 우리나라 한강 연안까지 깊이 침입한 전란이 있었다. 그때 만약 강공의 전략을 채용하지 않았다면 온 나라가 오랑캐 옷을 입을뻔 했다"라고 적었다고 전해진다.

서희의 담판으로 유명한 거란의 1차 침공은 성종 12년(993년)에 발생했다. 이후 현종 원년(1010년), 강감찬의 나이 61세 때 거란은 40만 대군을 이끌고 2차로 침공한다. 그리고 현종 10년(1019년). 바로 거란의 3차 침공이다.

거란은 병력수를 줄이는 대신 최정예로 10만명을 이끌고 침략했고, 고려는 강감찬을 최고 사령관인 상원수에 임명했다. 그의 나이 70세를 넘었을 때다. 이 때 귀주대첩으로 유명한 그의 빛나는 승리로 고려는 외환을 극복하고 500년 왕조사의 기틀을 다질 수 있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3차 침공 당시, 대다수가 산성에 의지하는 청야전술을 예상했지만 강감찬은 달랐다. 그는 20만8000여명의 군사 중, 기병 1만2000명을 뽑아 흥화진 성 동쪽 삼교천 주변에 매복시켰다. 앞서 두 차례의 침공에서 거란이 흥화진성을 가장 먼저 공격했던 점을 감안할 때 다소 엉뚱한 매복전략으로 해석될 수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남하한 거란군은 흥화진을 뒤로 하고 매복조가 있는 쪽으로 향했다. 이때 강감찬은 쇠가죽으로 물막이를 만들어 흥화진성 동쪽 강물을 막게 하고, 거란군이 접근하자 이를 터뜨려 물벼락을 가한 후 전열이 흐트러지자 매복시킨 기병을 동원해 타격을 가했다. 강감찬은 개경 직공이라는 적의 작전을 미리 간파하고 있었던 셈이다.

타격을 입은 거란군은 고려군과 접전을 피하며 개경을 향해 계속 내려갔고, 고려는 추격전과 매복전을 전개하며 적을 괴롭히는 전략을 썼다. 또한 강감찬은 김종현이 지휘하는 기병을 개경으로 급파했다. 2차 침공 때 거란군이 다가오자 개경을 포기했던 현종은, 이에 힘입어 3차 침공에서는 개경을 떠나지 않고 성을 사수했다. 계속된 전투에 사기가 저하되고 추위와 굶주림에까지 시달린 거란군은 결국 전투의지를 잃고 퇴각했다.

이후 강감찬은 마지막 승부수를 펼친다. 장소는 서희가 담판을 벌였던 귀주였다. 그는 성을 버리고 벌판 한 가운데서 마치 거란군이 이리로 올 것을 다 알고 있었다는 듯 적을 맞이했다. 강감찬의 놀라운 지휘력과 판단력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고려군은 귀주에서 대포위 작전에 돌입했다. 집결해있던 주력 부대는 물론, 개경에서 거란군을 뒤쫓던 김종현의 기마부대까지 나타나 후방공격을 퍼부었다. 결정적으로 승부를 갈리게 한 것은 갑작스레 바람이 바뀌며 분 강한 남풍과 빗줄기였다. 적벽대전의 승부를 가른 남동풍을, 강감찬 또한 읽어낸 셈이다.

귀주대첩 이후 거란은 다시는 고려를 침범하지 못했다. 살아서 압록강을 건너 돌아간 자는 겨우 수천에 불과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백발이 성성한 71세의 강감찬이 전쟁을 마치고 돌아오자, 현종은 도성밖으로 마중나와 연회를 베풀고 극진히 환영했다고 한다. 고려사는 당시 정경을, '임금이 금으로 만든 여덟가지의 꽃을 손수 강감찬의 머리에 꽂아준 뒤 왼손으로는 강감찬의 손을 잡고 오른쪽으로는 축배를 들어 그를 위로하고 찬양하니, 강감찬은 분에 넘치는 우대에 감당하기 어렵다는 뜻으로 사의를 표했다'고 전한다.

이후 강감찬은 연로함을 이유로 은퇴를 청했으나 임금은 3일에 한번씩 그를 입궐케했다. 강감찬은 이듬해 6월에서야 물러날 수 있었다. 이후 그는 조용한 노년을 보내다 덕종 원년(1032년)에 8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강감찬이 죽자 왕은 3일간 조회를 멈추고 인헌(仁憲)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도움말: 현대경제연구원)



조슬기나 기자 se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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