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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스토리]⑬단군이래 가장 슬픈 과부 숭인동에서 울고있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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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업원구기·청룡사·자주동샘·동망봉·여인시장
단종의 정비 정순왕후 송씨 발자취 따라가니


정순왕후의 '정업원 구기(옛 터)'. 비각 현판 '전봉후암어천만년 세신묘구월육일흠체서'라는 한문글씨는 영조대왕이 직접 쓴 것이다. "앞 산 봉우리와 뒤 바위 천만년을 가소서. 신묘년 9월 6일 눈물을 머금고 쓰다"로 풀이된다.

정순왕후의 '정업원 구기(옛 터)'. 비각 현판 '전봉후암어천만년 세신묘구월육일흠체서'라는 한문글씨는 영조대왕이 직접 쓴 것이다. "앞 산 봉우리와 뒤 바위 천만년을 가소서. 신묘년 9월 6일 눈물을 머금고 쓰다"로 풀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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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오진희 기자] 서울 종로구 숭인동 일대는 비운의 일생을 살다간 한 여인의 사연이 담긴 비석들이 곳곳에 눈에 띤다. 매일 아침저녁 죽은 남편의 명복을 빌기 위해 산에 올라 동쪽을 향해 곡을 했다는 사연부터 동묘 인근 채소시장 부녀자들이 불쌍한 주인공을 도왔다는 이야기, 자줏물 들인 비단을 빨았던 샘물까지. 이는 모두 조선 6대왕 단종의 정비 정순왕후 송씨와 관련된 것이다.
단종이 강원도 영월로 유배당하고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에서 정순왕후 역시 동대문 밖 숭인동에서 평생을 살아가는 운명을 맞았다. 열다섯에 혼인해 열여덟에 남편을 잃은 왕비. 조선 조정의 대신들과 왕실 사이 세력다툼으로 어린 왕비는 자신보다 한 살 어린 신랑을 잃어야 했다. 마지막으로 왕비가 단종과 만나 이별했던 자리인 영도교는 그 사연을 전하고 있다. 영도교는 '영원히 건너가신 다리'다.

지난 19일 햇살이 따사로운 초가을 오후 기자는 두 명의 문화재해설사와 함께 정순왕후의 자취를 밟아갔다. 그곳에선 왕비에서 관비로, 일찍이 과부가 돼 남은 60여년의 생을 홀로 조용히 살다간 한 여자를 만날 수 있었다.

서울 지하철 6호선 창신역 3번 출구로 나와 오른쪽 언덕길을 잠시 오르면 정순왕후가 기거했다는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가 나온다. 정업원구기는 '정업원의 옛 터'다. 여기서 '정업원'은 아직 고려 풍습이 남아있던 조선 초기 자식이 없는 후궁이나 결혼 후 남편을 잃고 혼자 살아야 하는 왕실의 여인들을 위해 세웠던 절을 의미한다.
정순왕후의 정업원이 세워진 연유는 조선 후기 영조대왕이 창덕궁에 갔다가 참판이던 정운유로부터 들었던 이야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세조가 정순왕후의 처지를 안타깝게 여겨 성안에 집을 마련해준다 했지만 남편이 유배된 영월땅이 보이는 동대문 밖에 살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재목을 내려 집을 지어주라 명했는데 그곳이 '정업원터'입니다." 이처럼 조선 21대 왕 영조는 정순왕후가 살았던 곳에 비석을 세웠다.

이 정업원 터 바로 옆에는 비구니 스님들이 있는 청룡사라는 절이 있다. 초대 주지로 고려말 공민왕의 비(妃)인 혜비가 망국의 슬픔을 안고 스님이 돼 머물던 곳이다. 태조 이성계의 딸 경순공주도 이곳에서 비구니로 살았다. 정순왕후 역시 이곳에서 스님으로 머물었다는 설도 있다.

자주동샘 우물. 이곳에서 정순왕후는 자줏빛 물들인 비단을 빨았다.

자주동샘 우물. 이곳에서 정순왕후는 자줏빛 물들인 비단을 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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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룡사를 지나 청룡마트에서 왼쪽 길로 더 오르다 보면 좌우로 종로구와 성북구로 나눠진 경계지점에 다다른다. 오른쪽으로는 한창 재개발이 진행되고 있는 상황이다. 종로구 영역 좌측 아래로는 다시 정순왕후의 흔적을 만날 수 있다. 바로 '자주동샘(紫芝洞泉)'이다. 우물이 그대로 보존돼 있으며 왼쪽으로는 각자가 써져 있다. 샘터 앞에는 조선시대 실학자 이수광의 거처였던 비우당(庇雨堂)이 현재 복원 중이다.

정순왕후는 생계를 위해 제용감에서 심부름 하던 시녀의 염색기술을 도와 자줏물을 들이는 염색업으로 여생을 살았다. 제용감은 각종 옷감의 채색, 염색, 직조 등을 관리하던 곳이었다. 그는 지치라는 식물의 뿌리를 이용해 비단에 물을 들였다. 이 비단을 바느질하며 댕기, 저고리, 깃, 고름, 끝동으로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팔았다.

숭인공원 내 체육시설 오른편 모퉁이에 '동망봉' 비석이 있다. 이곳에서 정순왕후가 죽은 단종을 그리워하며 통곡했다.

숭인공원 내 체육시설 오른편 모퉁이에 '동망봉' 비석이 있다. 이곳에서 정순왕후가 죽은 단종을 그리워하며 통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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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동샘 반대편으로는 동망봉이 우뚝 솟아있다. 정업원의 동쪽에 있는 산봉우리다. 영월로 유배된 노산군인 단종의 억울한 죽음을 알게 된 정순왕후는 매일 아침 저녁 동망봉에 올랐다. 이곳에서 동쪽을 바라보며 땅을 치고 가슴을 쳤던 정순왕후의 통곡소리는 인근 부녀자들의 마음도 사무치게 했다. 아랫마을까지 곡소리가 들려와 마을여인들도 동정곡을 했다고 전해진다.

문화관광해설사인 김도경씨는 "영조는 정업원 터 비석의 글씨 뿐 아니라 이곳 바위에도 '동망봉'이란 글자를 새겼으나, 일제강점기 이 일대 일부가 채석장이 되면서 바위가 깨져나가 글씨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설명했다.

실제 정순왕후가 매일 찾은 동망봉 터는 숭인공원 내 체육시설 한 모퉁이에 자리해 있었다. 봉우리 위에서 바라본 서울은 온통 아파트 단지와 건물들로 빼곡했다. 서울을 지나 멀리 강원도 영월을 마음에 새기며 한없이 울었던 그 자리는 쓸쓸하게 느껴졌다.

산 꼭대기에서 동묘 쪽 주택가로 내려가는 길은 여러 갈래였다. 최근 정비된 산책로가 다양하게 놓아져 있었다. 콘크리트 주택건물의 좁은 골목길을 한참 내려오면 어느순간 차들이 한창 달리고 있는 도로에 당도한다. 동묘는 중국의 장수인 관우(關羽)를 신앙하기 위하여 건립된 묘당이다.

횡단보도를 건너고 동묘를 지나면 왼편으로 동묘벼룩시장이 펼쳐진다. 추석을 앞두고 시장은 한창 손님들로 붐볐다. 각종 중고물품과 골동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나이 지긋한 중년이상 연령대가 주를 이뤘지만, 활기띤 모습이었다. 인산인해를 이룬 이곳에서 정순왕후의 흔적찾기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숭신초등학교와 동묘 사이에 있는 벼룩시장에 대해 이옥희 여성문화유산해설사 사무국장은 "30여년전 황학동 벼룩시장이 쇠락하면서 장사꾼들이 밀려와 동묘옆 벼룩시장이 성황을 이루고 있다"면서 "초등학교 인근에 정순왕후와 관계된 '여인시장'터를 알리는 표지석이 인근에 있다"고 말했다.

동묘벼룩시장에서 의료기를 파는 매대 안에 정순왕후와 인연이 있는 '여인시장' 터를 알리는 비석이 있었다.

동묘벼룩시장에서 의료기를 파는 매대 안에 정순왕후와 인연이 있는 '여인시장' 터를 알리는 비석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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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을 찾았던 표지석은 초등학교 담장 바로 앞 '저주파 자극기'라는 의료기를 판매하는 매대 구석에 숨어있었다. 손님들이 모여드는 가운데 정순왕후의 흔적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여인시장' 터인 이곳은 조선 수도 한성부의 역사와 모습을 기록한 한경지략에 "영도교 인근에 정순왕후를 돕기 위해 마을 여인들이 금남(禁男)의 채소시장을 열었던 곳"이라고 전하고 있다. 끼니조차 제대로 이을 수 없었던 정순왕후에게 푸성귀 같은 먹거리라도 전하기 위해 여인시장을 만들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왁자지껄한 시장을 뒤로하고 만난 곳은 단종과 정순왕후의 '영이별'의 현장인 '영도교'였다. 1457년 열여덟 정순왕후는 영도교에서 영월로 유배를 떠나는 단종과 헤어지는데 정식 인사도 못하고 이별한 뒤 다시는 만나지 못한다. 그래서 '영이별 다리'로도 불렸다. 당시 초라한 나무다리였다. 나중에 돌다리로 바뀌었다가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다리를 석재로 사용하면서 사라졌었다. 지금은 청계천 복원과 함께 다시 세워져있다.

단종과 정순왕후의 '영이별'의 현장 '영도교'.

단종과 정순왕후의 '영이별'의 현장 '영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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