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이 났다. 네 명의 아이를 입양했던 박사는 죽었고, 그들의 유모 메리(추정화)는 전신화상을 입었으며, 아이들은 살아남았다. 아이들에겐 화재사건 전후의 기억이 없지만, 사건은 그들에게 큰 트라우마로 남았다. 첫째 한스(정상윤)는 알콜중독에 빠졌고, 둘째 헤르만(강하늘)은 더욱 감정적이 되었으며, 막내 요나스(김대현)는 공황장애와 언어장애를 동시에 앓고 있다. 그리고 유일한 여자아이였던 안나(임강희)는 말을 아꼈다. 매일 밤 동화책을 읽어주고 그들을 구출해낸 메리는 사라졌지만, 12년 후 자신의 명예를 되찾기 위해 혹은 진실을 알기 위해 다시 이 사건을 꺼내든 변호사 한스로 인해 직면하지 않았으면 했던 기억의 문이 열리기 시작한다. 그 문 앞에서 <블랙메리포핀스>(이하 <블메포>)는 묻고, 아이들은 대답한다. 기억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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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모서리에서 질문을 던지는 문제작
스릴러라는 장르에 걸맞게 <블메포>에는 긴장감이 가득하다. 진실을 찾아가는 과정을 회전무대에 담았고, 베일에 싸인 기억은 겹겹이 쌓인 벽으로 풀어냈다. 직관적으로 보이는 것이 아닌 의미를 찾아내야 하는 안무와 연신 음울하게 흘러나오는 피아노 선율 역시 마찬가지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만화 <몬스터>부터 뮤지컬 <쓰릴 미>에 이르기까지 장르를 불문한 수많은 레퍼런스들이 떠오르고 후반부의 반전이 아쉽지만, 나름의 뚝심으로 미스터리를 구축해낸 서윤미 작가는 스릴러를 표방했던 그의 전작 <웰컴 투 마이 월드>에서 크게 진일보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 힘을 실어준 것은 배우들의 호연이다. 특히 장남 한스 역의 정상윤은 툭툭 내뱉는 대사 톤으로 끝을 알 수 없는 길에서 헤매이는 자의 피로감을 생생하게 그려냈고, 안나 역의 임강희는 자신이 가진 청아한 목소리와 단정한 이미지로 인해 안나의 상처를 들여다보는 순간의 분노를 더욱 극적으로 표현해낼 수 있었다. 흩어진 구슬은 제법 무난하게 꿰어져있다.
사진제공. 아시아브릿지컨텐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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