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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칼럼]영어만 쓰는 어떤 레스토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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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박지선 기자]

언어는 국력이다. 특히 해외에 나가면 이 논리는 피부로 느낄 수 있다. 유적지나 박물관에 비치된 안내문을 생각해보자. 자국어 안내문은 기본이고 영어는 필수다. 대체로 프랑스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일본어, 중국어 등의 안내문이 제공된다.
지난 2008년 2월엔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서 한국어 서비스가 시작됐다. 당시 이 일을 두고 우리나라의 문화 품격이 한 차원 올라섰다는 내용의 보도를 수없이 접했다. 과거 루브르 박물관에는 프랑스어, 영어, 독일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일본어 서비스가 진행되어왔다.

한국어는 루브르 박물관에 입성한 일곱 번째 언어다. 해외 화장품 브랜드의 제품 설명서에 한국어 설명이 적혀 인쇄되기 시작한 것은 채 10년이 안 된다. 그 전에는 한국 지사에서 별도 인쇄해 포장에 삽입했었다. 한국 시장이 중요해지자 화장품 브랜드도 한국어를 대우하기 시작한 것이다.

어딜 가나 영어는 빠지지 않는 언어고, 제일 먼저 등장한다. 세계 공용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일까? 세계화를 너무 강조한 대한민국의 어느 레스토랑에서는 영어만 인정하고 있다. 기자는 지난주 도산 공원 부근 레스토랑에서 점심 식사를 했다. 그곳은 서울과 부산 등에 체인점을 운영 중인 곳으로 레스토랑은 국내 유통 대기업 중 한 곳이다.
테이블에 놓여진 메뉴판을 보니 온통 영어. 잘못 전달된 것이겠거니 생각해 서빙하는 직원을 찾아 한국어 메뉴판을 달라고 했다. 없단다. 그 메뉴판은 이런 식이다. 'Southern-style tuna salad with chopped pickles and boiled eggs' 'Black rice salad with green beans, dried apricots, almonds, celery, red wine vinaigrette.' 한글이라고는 '닭고기는 한국산' 이런 식으로 원산지 표시가 전부였다.

직원은 메뉴와 관련해 궁금한 게 있으면 도와주겠다고 했다. 과연 무얼 도와준다는 얘기일까? 영어를 통역해주겠다는 얘긴가? 기자에게 어울리는 음식을 짐작해 추천이라도 해준다는 얘기인가?

주문하려니 그것도 쉽지 않다. 메뉴판에 적힌 대로 하자니 '파니니 위드 햄 앤 에그스 샌드위치…' 이런 식으로 하라는 얘기다. 결국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이거 주세요"라고 했다. 마치 외국 항공사에 탑승해 외국 승무원에게 '치킨 플리즈' 외치는 그런 기분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이 레스토랑 관계자에게 메뉴 정책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 "저희 콘셉트입니다. 메뉴와 재료 자체가 서양에서 온 것이 대부분이라서요. 이곳을 찾는 많은 분들이 해외 유학이나 여행 경험이 많아 메뉴에 대해 생소해하지도 않으세요." 한국어 메뉴판 찾는 사람이 없냐고 했더니 많지 않다고 답했다. 그 레스토랑은 백화점에 입점된 매장에서만 한글 메뉴가 제공된다고 설명했다.

반대로 생각해보자. 그렇다면 이탈리아 어느 도시에서 영업 중인 한국 음식점에서 이탈리아어나 영어 없이 한글만 적힌 메뉴판만 있어도 될까?

우리가 쓰는 말과 글 가운데에는 외국어, 외래어의 비중이 높다. 순수 우리말과 글만으로는 의사소통은 힘들다. 그러나 외국인을 상대로 영업하는 곳도 아닌 서울 시내 레스토랑에서 한국어 메뉴판이 없다는 것, 그것을 지적하는 일은 촌스러운 일일까? 글로벌화된 요즘 세상에서 보편적인 일이라고 너그러이 넘겨야 할까?

최고급 인테리어 자재로 마감하고, 신선한 재료로 음식을 만들고, 직원들의 유니폼은 세련됐다. 그래서 한글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발상은 참으로 신기하다. 그날 그 레스토랑엔 영어로 대화하는 테이블은 없었다. 우리말과 글은 한글날에만 생각할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우리 말과 글, 한글날에만 생각할 일은 아니다.



박지선 기자 sun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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