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기억 하나. 70년대 후반 필자가 다니던 중학교에서는 독서 시간을 따로 두고 있었다. 그 시간 후에는 전교생의 책 이동이 파도처럼 이루어지는 신나는 시간이 이어졌다. 반별로 동일한 책을 모든 학생이 읽고 일주일 후 뒷반 같은 번호 학생에게 책을 물려주면서 동시에 또 앞반 학생에게서 새 책을 받는 시간이었다. 앞반에서 새 책을 받으랴 읽은 책을 뒷반으로 넘기랴 부산한 시간이 지나면 우리는 일주일 내내 새 책을 가방 안에 넣고 다니면서 읽곤 했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야한 내용을 서로 알려주며 사춘기 소녀답게 키득거리기도 했고, 등장인물의 악한 행동에 대해서는 같이 성토하기도 했다. 모두 같은 책을 읽었기에 수시로 책에 대해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독서 시간에 이루어진 자유로운 독후감 발표를 통해 다른 친구의 생각을 듣는 것도 즐거운 일이었다. 독후감 잘 쓴 학생을 선정하여 상을 수여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그래서 우리는 친구들의 다양한 생각을 존중하면서 책을 읽을 수 있었다.
필자의 중학교 시절 독서 경험이 행복할 수 있었던 것은 오늘날에 비해 비교적 자유로웠던 독서 교육 프로그램 때문일 것이다. 교육용 도서 목록을 정하고, 학교에서 책을 구입하여 학생들에게 나누어줌으로써 책 구입에 대한 부담 없이 독서가 이루어지도록 했고, 정규 수업으로 독서 시간을 따로 마련하여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을 제공했으며, 무엇보다도 독서가 경쟁구조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 자유롭게 생각을 나눌 수 있는 공간 속에서 이루어지도록 배려했다. 기억에 남는 한국 소설과 세계 명작들은 대부분 중학교 때 읽었고, 그때의 독서 경험은 평생 나의 중요한 정신적 자산이 되었다.
학생이 어떤 독서 경험을 하는지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진정한 독서 교육을 위해서는 외부에서 이루어지는 행사용 독서 대회, 다른 사람에게 책을 얼마나 읽었는지 입증하기 위한 독서 포트폴리오, 상급 학교 진학을 위한 스펙용 독서 등을 강조하는 것으로부터 시급히 벗어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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