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쾌속의 레이스 도중 삐끗 코너링에서 미끄러졌고 방호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뒤에서 달려오던 경주차가 2차 충돌. 차량은 순식간에 내동댕이 쳐진채 불길에 휩싸였다. 드라이버는 의식을 잃었고 안전요원들이 접근했을땐 그의 몸도 타고 있었다.
F1역사상 가장 유력한 챔피언에게 일어난 끔찍한 사고라 할 수 있다. 이마 얼굴에서 귀와 손까지 뭉그러질대로 뭉그러진 뒤였다. 팬들은 눈물로 그의 쾌유를 빌 뿐이었다.
목숨을 잃은 뻔 했던 니키 라우다는 기적처럼 6주만에 경주차를 타고 팬들 앞에 손을 흔들며 복귀했다. 시리즈 챔피언을 위해 성형수술 등 사후조치를 포기한채 핸들을 잡은 것이다. 얼굴은 완전히 달라졌을 정도로 흉측했지만 팬들은 다시 눈물로 그의 복귀를 환영했다.
오스트리아 빈 출신인 니키 라우다는 1970년대와 1980년대 F1을 주름잡은 영웅이다. 죽음을 앞두고 그는 기적적으로 소생했고, 6주 만에 머리에 붕대를 감싼채 복귀했다. 이를 두고 스포츠 사상 가장 용감한 컴백으로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을 정도다. 지금도 F1의 살아 있는 전설과 불사조로 불리고 있다.
그는 1968년 19세때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모터스포츠에 뛰어들었고, 69년에는 본격적인 포뮬러 레이스에 참가하기 시작했다. 그의 집안은 부유했지만 모터스포츠를 위해 배경을 버린 풍운아이기도 했다.
라우다의 F1 데뷔는 무리하게 이루어졌다. F1에 도전하기 위해선 더 많은 돈이 필요했고, 이 때문에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돈을 대출했다는 이야기는 지금도 그의 카레이싱 열정을 이야기 할 때 회자되기도 한다. 그런 가운데 73년 젊은 드라이버가 필요했던 BRM팀이 그의 가능성을 간파하고 팀의 세 번째 드라이버가 되어주길 바랬다.
신이 난 라우다는 73년 벨기에 그랑프리에서 5위를 낚아챘다. 영국 그랑프리에서는 비록 승리하지 못했지만 인상적인 레이스를 펼쳤다. BRM팀 오너 L. 스탠리는 라우다에게 만족감을 나타냈고 계속 드라이버로 뛸 수 있게 해주었다.
74년 라우다는 BRM을 떠나 페라리팀 드라이버가 되었다. 이 해 종합순위는 4위였다. 그리고 75년 시즌을 맞이한 라우다는 짧은 기간 크게 변해 있었다.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라우다는 모나코, 벨기에, 스웨덴 그랑프리에서 3연승을 올리며 승승장구했다. 드디어 그 해 라우다는 첫 월드 챔피언 타이틀을 품에 안았다.
76년은 그에게 어둠의 시즌이었다. 라우다는 시즌 10전 독일전 사고를 딛고 챔피언을 노렸지만 화상으로인한 후유증은 어쩔 수 없었다. 결국 단 1점차로 드라이버즈 타이틀을 J. 헌트에게 내주고 말았다.
77년 라우다는 페라리에서 다시 3승을 올리면서 두 번째 월드 챔피언에 올랐다. 이 때부터 현대의 모터스포츠 전문가들은 현역 드라이버 가운데 M. 슈마허를 제외하고 페라리팀을 거쳐간 가장 뛰어난 드라이버로 라우다를 손꼽게 됐다.
시즌을 마감한 후 그는 브라밤팀으로 떠나갔다. 그러나 페라리만큼 빠르지 않은 경주차는 그에게 단 2승을 가져다주었고 4위로 78년 시즌을 끝마쳤다. 79년 성적은 더 초라해졌고 결국 라우다는 F1계를 떠났다.
은퇴 뒤 라우다 항공 등 사업가로 변신한 82년 라우다는 맥라렌으로부터 드라이버 제안을 받았다. 다시 컴백한 그 해 2승을 올렸고 시즌 5위에 올랐다. 83년은 시즌 10위로 끝마쳤다. 84년 팀 동료이자 떠오르는 젊은 스타였던 A. 프로스트를 단 1점차로 제치고 통산 3회 짜릿한 시즌 우승을 맛보았다.
이로써 끝이었다. 알랭 프로스트의 시대가 찾아왔기 때문이다. 85년 그는 마지막 시즌을 맞이했다. 그는 더 이상 A. 프로스트를 따돌릴 수 없음을 직감했다. 시즌 중반 네덜란드 그랑프리에서 가까스로 프로스트를 이겨낸 라우다는 시즌 마지막 경기인 호주 그랑프리를 마치고 그의 F1 경력에 종지부를 찍었다.
임혜선 기자 lhs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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