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kg대의 거구가 앉아 있으면 손님이 없어도 꽉 차는 느낌입니다. 10대에 휘젓던 모래밭도 20대에 조명 받던 무대도, 방황했던 30대의 길바닥도 그 보다는 컸을 겁니다. 불혹을 두 해 앞두고 마침내 정착한 20평 족발가게 상호가 <박광덕의 천하장사 족발>. 결국 자기 얼굴과 이름을 걸고 승부를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1972년생 박광덕은 태어날 때부터 보통 영아들 두 배(7.8kg)나 된 거구였기에 운명적으로 씨름선수가 됩니다. 고교시절부터 전국씨름대회 강자로서 강호동보다 1년 늦게 LG소속 아이돌 프로씨름 선수로 스카우트 돼 천하장사 준우승 5번, 백두장사 3번을 차지하며 승승장구합니다.
대선배들을 모래밭에 내다꽂고 포효하며 공중제비를 돌았던 천하장사 강호동의 대변신에 이어 람바다 춤을 추며 연예계에 얼굴을 내민 박광덕이란 신예. 그렇지만 둘의 성적표는 씨름판에서처럼 역시 강호동의 일방적 승리였습니다.
그러나 강호동을 발굴했던 연예계는 1996년 그를 제2의 물건(?)으로 보고 방송계로 데뷔시킵니다. 강호동 못지않은 인기를 기대했지만 씨름밖에 몰랐던 충청도 청년에게 연예인 생활은 결코 만만치 않았습니다.
비록 1년도 못 버틴 바닥이지만, 단기간에 씨름선수 시절보다 큰돈을 벌다보니 주위에는 돈을 빌려달라는 사람이 늘었고, 마음 약해서 돈을 빌려주며 떼이고 때로 사기까지 당하면서 빈손으로 연예계를 떠납니다. 얼마 후 올라 선 저울에서 어느새 200kg에 가까워진 인생의 무게를 목격하고 충격을 받습니다.
몇 해 흐른 후에, 어느 날부터 소리 없이 잠적한 박광덕이 죽었다는 소문까지 듣게 됩니다. 우선 빚부터 갚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결혼식과 칠순잔치 등 각종 행사장을 전전하며 웃음을 팔아 재기에 성공하지요.
술집과 라이브카페 감자탕 등 업종 불문의 사장을 거치면서 ‘크게 할수록 망할 때는 더 치명적’인 사실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5년 전 드디어 10억원이 넘던 빚을 다 갚고, 적게 벌지만 좀 더 고객과 친하며 실속 있게 사는 행복을 알았던 것이죠.
고작 10여개 테이블에 꽉 차야 40명도 못 앉는 룸이지만, 사방 벽에는 람바다 춤을 추던 선수시절 전성기의 사진들이 붙어있어 눈길을 잡습니다. 주문한 양에 따라 천하장사·백두장사·한라장사 족발로 나뉘는 메뉴도 나름 개성을 살린 아이디어로 보입니다.
한 번도 차지하지 못했던 천하장사 벨트가 한이 되었을까요? 대신 프랜차이즈 점포로 키워서 반드시 성공신화를 써보겠다는 그. ‘천하장사 족발’ 간판과 명함은 새끼돼지를 가슴에 껴안은 귀여운 캐리커처였습니다.
쉬 좌절하는 젊은이들에게 그가 들려주고 싶은 말. 그건 남의 말을 쉽게 듣지 말고 한번 밖에 못 누리는 청춘, 잘 나갈 때 자만하지 말고 소중하게 처신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늦은 밤이면 인천의 나이트클럽이 고정 일자리가 되고, 휴일도 불러만 준다면 어디든지 달려간다는 주인장의 얼굴에 자신감이 가득했습니다.
어느 초대 받은 가게 개업식에서 ‘부디 부자 되게 해 주라’고 엎드려 절할 때 마주쳤던 돼지머리의 미소와 박광덕의 환한 웃음이 참 닮았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한때 자해를 하려고 들었던 비장한 칼이 돼지족발을 저미는 예리한 칼로 변할 때까지 무려 10년이란 세월이 필요했습니다.
젊은 혈기만 믿고 자칫 딴 생각하여 한 눈을 팔면 일찍 파산을 경험하기 십상이고, 다시 마음잡고 자리 잡아서 가게 하나를 성공시키기가 이리도 어려운 세상.
추석 연휴에도 고향을 찾지 않고 취직자리를 구해보겠다는 젊은이들이 30%가 넘는다는 현실에서 우리 시대의 아픈 일면을 봅니다. 그들 중 몇몇이라도 인천 부평 롯데백화점 골목길에서 천하장사 족발집 박광덕을 만나서 마음의 위안을 받을 수 있다면…
김대우 시사평론가 pdikd@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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