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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의 한국유사] 강조의 정변과 현종의 즉위

최종수정 2019.06.13 08:53 기사입력 2019.06.13 0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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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종, 왕위 지키려 끌어들인 강조에 오히려 피살

[이상훈의 한국유사] 강조의 정변과 현종의 즉위


1009년 서경도순검사(西京都巡檢使) 강조(康兆)가 군사 5000명을 거느리고 개경 도성으로 난입해 목종을 몰아내고 현종을 옹립했다. 이른바 강조의 정변이다. 고려 목종이 어린 나이에 즉위하자 어머니 천추태후(天秋太后)가 섭정을 했다. 천추태후는 정부(情夫)였던 김치양(金致陽)을 궁궐로 불러들여 정국을 장악했다. 문제는 둘 사이에 아들이 태어났고, 목종에게는 후사가 없었다. 천추태후와 김치양은 그들 사이에 태어난 아들을 목종의 후사(後嗣)로 삼고자 했다. 마침 그때 천추태후가 머물던 천추전(千秋殿)에 화재가 발생했다.


"왕이 여러 날 몸이 편치 않자 늘 내전(內殿)에만 있으면서 여러 신하를 만나기 싫어하였다. 재신(宰臣)들이 매우 두려워하여 침전(寢殿)에 들어가서 문병하기를 요청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였다. 왕은 채충순(蔡忠順), 최항(崔沆)과 더불어 몰래 후사 문제를 의논한 후 황보유의(皇甫兪義)를 보내 신혈사(神穴寺)에서 대량원군(大良院君)을 맞아오게 하였다. 서경도순검사 강조가 무장한 병력을 거느리고 도착하여 드디어 왕을 폐위시킬 음모를 꾀하였다."


천추전 화재 이후 정국은 급변했고 목종은 중병을 얻어 두문불출했다. 목종은 신하들의 접견을 거부하고 몰래 채충순, 최항과 함께 자신의 후사 문제를 논의했다. 훗날 현종이 되는 대량원군을 맞아들여 자신의 뒤를 잇게 하고, 한편으로 군사력을 보유한 서경도순검사 강조를 불러들여 자신을 호위하게 할 요량이었다. 하지만 목종은 강조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나고 나중에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강조의 정변과 현종의 즉위는 우연과 의문으로 점철되어 있다. 목종이 궁궐에서 쫓겨나 임진강을 건너 충주로 향할 때 전혀 병자의 모습이 아니었다. 천추태후가 식사를 하고자 하면 그릇을 받들었고, 말을 타고자 하면 말고삐를 직접 잡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목종이 이동하다가 적성현에서 호송하던 강조의 부하들에게 살해당했다는 것은 그가 건강했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목종이 아파서 내전에 틀어박혔다는 것은 거짓일 가능성이 높다(김창현 2005).


목종은 대량원군(현종)을 불러오기 위해 보낸 편지에 "만약 (자신의) 남은 수명이 있다면 (대량원군을) 동궁(東宮)에 머무르게 하여 여러 사람들의 마음을 안정되게 하겠노라"라고 하였다. 목종 자신이 죽지 않는다면 양위(讓位)하지 않고 그대로 국왕으로 남아있으면서, 대량원군을 세자로 삼아 동궁에 머무르게 하겠다는 의미다. 또 목종이 폐위당했을 때 최항에게 말하기를 "시골에 내려가 노년을 보내고자 하니, 경이 새 왕에게 아뢰고 또 그를 잘 보좌하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목숨이 경각에 달렸다는 사람이 노년을 보내기 위해 시골에 내려가 조용히 살겠다는 의지를 내비친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목종은 국왕 자리를 내놓을 의사도 없었고 실제 크게 아프지도 않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다고 한다면 천추전 화재 사건 이후 목종이 칩거한 것은 아파서가 아니라 정국 장악을 위한 의도적 은거라 할 수 있다. 병을 핑계로 외부와의 접촉을 차단하고, 일부 친위세력만 정보를 공유하면서 불리한 정국을 돌파하기 위한 노림수였던 것이다. 대량원군(현종)을 불러들여 후사를 확정짓고 강조를 불러들여 군사적 안정을 취하고자 했다. 쉽게 말해 김치양 일파를 몰아내기 위한 일종의 친위쿠데타였던 것이다.


하지만 운명은 목종이 의도한 바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강조의 군사들이 개경 도성에 도착했다. 서경도순검부사(西京都巡檢副使) 이현운(李鉉雲)이 도성의 영추문(迎秋門) 안으로 들어와 크게 소란을 피웠다. 목종은 놀라고 두려워하여 유행간(庾行簡)을 사로잡아서 강조에게 보냈다. 유행간은 목종의 최측근이자 밀접한 관계로 총애를 받아 권력을 농단하던 인물이었다. 도성 진입에 앞서 강조는 목종에게 연락을 취해, 이번 사태의 원인으로 김치양 일파와 유행간을 지목한 바 있다. 목종은 강조가 지목한 유행간을 보내어 강조의 기분을 맞추려 했던 것이다.


강조가 궁궐의 서쪽문인 대초문(大初門)에 이르러 최항을 만났다. 이때 최항은 "예전에도 이러한 일이 있었는가"라고 물었고, 강조는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다. 곧이어 강조의 군사들이 궁궐로 난입했다. 목종은 피할 수 없음을 인지했다. 천추태후와 함께 하늘을 우러러 보며 목놓아 울면서 법왕사(法王寺)로 갔다. 강조는 목종과 최항의 의도와 달리 자신의 생각대로 움직였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고려해 볼 것은 국왕이나 대신이 허락하지 않은 상황에서 강조가 어떻게 무사히 도성 내로 진입할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아무리 정치가 혼란스럽고 군대에 대한 장악력이 약했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국왕이 존재하는 도성 자체에 대한 통제는 가능했을 것이다. 국왕이 진입 허가를 내리지 않으면 불법으로 진입하려는 외부 세력과 교전이 벌어지기 마련이다. 물론 수도를 방어하던 2군(軍) 6위(衛)가 현종대에 가서야 완비되지만, 이 당시에도 적지 않은 병력이 편성되어 있었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고려사(高麗史)'나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의 기록에 직접 교전이 발생했다는 언급은 확인되지 않는다.


'고려사절요'의 기록에 강조의 군사들이 개경 도성에 진입하기 전 '태양빛이 붉은 장막을 드리운 것과 같았다(日色如張紅幕)'라는 표현이 남아 있다. 태양빛이 붉은 장막을 드리운 것과 같은 상황 직후에, 이현운이 영추문 안으로 진입해 소란을 피운 것으로 되어 있다. 이는 피가 튀는 전투가 벌어졌거나 불길이 치솟았거나, 아니면 둘 다 벌어졌음을 암시하는 문장이라 할 수 있다. 목종과 최항은 강조의 도성 내부 진입을 허용하지 않았지만, 강조가 임의대로 무력을 동원해 뚫고 들어갔던 정황을 묘사한 것이라 판단된다.


강조의 정변은 한마디로 군사 정변이다. 정보 전달이 제한적이었던 전근대 시기에 유혈 충돌이 발생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대로 믿을 수 있을까? 그렇다면 당시 기록에는 왜 직접적인 유혈 충돌 기록이 남아있지 않을까? 김치양 세력에 맞서 채충신과 함께 대책을 논의했던 최항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현종이 즉위하고 강조가 사망한 후, 1012년 최항은 감수국사(監修國史)가 되어 사서(史書) 편찬을 담당했다.


현종의 즉위는 천명에 따라 이루어진 것으로 기록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목종의 폐위와 현종의 즉위 과정은 피를 보지 않고 순리에 따라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것으로 정리해야만 했다. '목종은 무례한 강조 때문에 궁궐에서 쫓겨나 살해당했으며, 현종은 혼란한 정국을 수습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왕위에 올랐다. 그 과정에서 현종의 왕위에 대한 개인 욕심은 없었으며, 유혈사태도 발생하지 않았다.' 태조의 유일한 적통이 병든 국왕의 간청에 따라 도성으로 나아가 왕위를 잇고 정국을 안정시키며 다시 왕씨 왕조의 태평성대를 이룬 것이다.


강조의 도성 강제 진입은 두 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단계는 강조가 서경을 출발하여 개경 도성의 외곽에 도착하는 단계다. 목종의 명령을 명분으로 내세운 상태에서 대규모 병력을 동원했기 때문에 도중에 막아설 세력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2단계는 강조가 군사들을 거느리고 도성 내부로 진입하는 단계다. 목종의 허가없이 무장 병력을 인솔하여 도성으로 진입한다는 것은 도성 방어군과 교전을 의미했다. 이때 목종의 명령이 아닌 또다른 명분이 필요했다. 도성 외곽에 도착한 강조는 바로 진입하지 않고, 자신의 부하 김응인을 신혈사로 보내 대량원군(현종)을 맞아오게 했다.


앞서 문종은 황보유의 등 10명에게 신혈사로 가서 대량원군을 데려오게 하고, 이들을 마중하기 위해 군사 100명을 개경 교외에 대기시켰다. 하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문종이 보낸 황보유의와 강조가 보낸 김응인이 같은 날 함께 신혈사에 도착해, 대량원군을 설득해 데리고 나왔다. 이는 대량원군(현종) 세력과 강조 사이에 어떠한 사전 교감이 있었음을 나타낸다. 결국 대량원군을 앞세운 강조는 도성으로 진입해 목종을 폐위시키고 현종을 옹립했다.


원래 현종 입장에서는 천추태후와 김치양 세력이 자기 목숨을 계속 위협해 왔기 때문에, 후계자가 필요한 목종에게 의탁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목종의 경우 실제 병들지도 않았고 왕위를 쉽게 양위할 생각도 없었다. 현종은 목종이 자신을 정치적으로 이용만 하다가 버릴 수 있다고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30세인 목종은 아직 젊고 건강했기 때문에 언제든지 후사를 생산할 수 있었다. 목종의 아들이 태어날 경우 현종 자신은 다시 제거되어야 하는 존재였다.


현종은 천추태후와 김치양 세력이 제거되고 나면 자신의 안위를 장담할 수 없었다. 그럴 바에는 차리리 사사로이 군사를 움직인 강조와 같은 배를 타는 것이 더 유리했다. 강조는 정국 혼란과 정보 혼선으로 갈팡질팡하다가 병력을 제때 동원하지 못해 정국이 안정되면 처벌받아야 할 처지였다. 판이 새로 짜졌다. 목종의 안위를 위해 동원되었던 현종과 강조가 오히려 목종을 몰아내고 정권을 차지한 것이다. 이후 강조는 거란과의 전쟁에서 사망했고, 현종은 전쟁을 수습하며 고려 왕조의 안정을 다진 국왕으로 자리매김했다.



이상훈 육군사관학교 교수

이상훈 육군사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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