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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경영] 환곡의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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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환곡제도를 운영하던 충청남도 보령군 충남수영 내 진휼청의 모습[이미지출처=문화재청]

조선시대 환곡제도를 운영하던 충청남도 보령군 충남수영 내 진휼청의 모습[이미지출처=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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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이현우 기자] 지금으로부터 200년 전인 19세기 초반, 동북아시아에서 재난지원금 체계가 가장 잘돼 있던 국가는 조선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봄철 춘궁기에 저리로 곡식을 빌려줬다가 추수철인 가을에 약간의 이자를 붙여 원금을 납부시키는 ‘환곡’이란 재난지원금은 조선왕조가 동북아에서 가장 많이 비축해놓고 활발히 운영하던 상태였다.


당시 인구가 4억명에 이르던 중국 청나라는 쌀 2000만석을 환곡으로 비축했을 뿐이지만, 인구가 고작 1000만명 남짓한 조선에서는 청나라의 절반에 해당하는 1000만석 이상이 비축돼 있었다. 당시 조선 왕조의 1년 세입이 400만석 정도임을 감안하면 최소 3년치 세입을 재난지원금으로 쌓아놓은 상태였던 셈이다.

이에 비해 일본은 이런 재난지원금을 아예 마련해놓지 않았고, 수도와 각 대도시를 제외하면 모두 각 지방의 영주들이 알아서 책임지는 형태로 돼있었다. 이로 인해 17세기부터 18세기까지 각종 기상 이변에 따라 기근과 천연두 등 전염병이 발생했을 때, 조선 왕조는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 잘 대처할 수 있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 환곡 덕에 다른 나라들과 달리 대대적인 민란은 발생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 막대한 규모의 환곡은 이후 19세기 내내 조선의 재정을 짓누른다. 조선왕조는 3년치 세입에 해당하는 이 재난지원금을 유지하기 위해 막대한 세입을 오로지 환곡 마련을 위해 소모하기 시작한다.


쌀은 오래 보관할 수 없기 때문에 묵은 쌀은 시중에 풀어주고 새로 추수한 쌀로 바꾸는 동안 어마어마한 교환 비용이 낭비됐다. 이 과정에서 부정부패가 함께 끼어들면서 환곡은 국가의 큰 짐으로 바뀌고 말았다. 당시 한창 세계 정세가 격변하던 19세기 중엽으로 넘어오면서 국가 존속을 위한 새로운 기술개발이나 무기개발 등에 쓸 예산마저 모두 잡아먹었다.

지방관들은 자기네 지역에 할당된 환곡에 손실이 날까봐 전전긍긍했다. 환곡에 손실이 나면 그 자리에서 지방관이 무능하다며 교체해버렸기 때문에 무슨 수를 써서든 조정에서 할당한 양만큼 환곡을 보전해야했다. 자신들이 원치 않아도 탐관오리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환곡의 납부 시한이 다가오면 지역 상인들에게 먼저 환곡을 대납케 하고 징세권을 넘겨주는 경우도 심심찮게 발생했다.


결국 재난지원금에 국가 예산 전체가 말려들어가면서 조선은 근대화에 쓸 자금조차 마련하는 데 실패했다. 예산 자체는 조선왕조보다 훨씬 적었지만 전체 예산의 90% 이상을 군비로 투입한 일본 메이지 정부와의 격차는 여기서 벌어졌다. 이 환곡 예산이 근대화에 맞춰 사용됐다면, 우리의 근현대사는 지금 알려진 것과는 많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이현우 기자 knos84@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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