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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비비] 공직 적폐 청산의 결과

최종수정 2019.12.05 12:00 기사입력 2019.12.05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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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비비] 공직 적폐 청산의 결과


대한민국을 지금의 위치까지 이끈 원동력 중 하나는 다른 나라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공직가치와 문화다. 958년 고려시대 광종이 중국에서 귀화한 쌍기(雙冀)의 건의를 받아들여 과거제(科擧制)를 시행했다. 지금은 중국에서조차 단절된 과거제 전통이 한국의 공무원시험 제도로 융성했다. 수많은 젊은 인재들이 청운의 뜻을 품고 공무원의 길을 선택해왔다. 국가와 민족의 이익을 위해 봉사한다는 자부심이 있기 때문이다. 세계적으로도 관료주도 국가발전 모델의 드문 성공사례가 한국이다. 군사독재 정부가 민주주의를 탄압하던 시절에도 공안ㆍ대공 부처 공무원들이 정권의 정치적 이익에 봉사하는 도구로 활용되긴 했지만, 최소한 경제나 외교 분야는 국가이익을 잣대로 정책을 펴도록 정권이 보장했다. 그래서 독재시대에도 공무원들이 자부심을 갖고 경제ㆍ외교정책에 매진할 수 있었다.


지금 많은 공무원들은 자기 소신과 충돌하는 정책을 수행해야 하는 처지다. 경제정책으로 잔뼈가 굵은 경제 관료들은 나날이 추락하는 한국 경제의 해법이 '소득주도성장'에 있다고 고수해야 하는 상황이다. 평생 외교현장을 누빈 외교관들은 '묻지마식 반일외교'를 실행하고 있다. 남ㆍ북ㆍ미 정상회담 일정에 맞추어 실리를 다 내주고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재협상을 졸속 타결시켜야 했고, 청와대에서 갑자기 하달되는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파기와 번복 결정을 옹호하는 임기응변을 발휘해야 했다.


공직 문화는 또 어떤가. 직장 내에서 상사가 지시하는 내용을 녹음하거나 기록해 두는 건 기본이 됐다. 상사와 부하 공히 녹음기를 틀고 업무지시를 주고받는 진풍경도 벌어진다. 무엇이 국가이익인지는 격의 없는 토론을 통해 도출되게 마련인데 공무원들의 직장 회식 때마저 토론문화는 실종됐다. 그렇더라도 위에서 시키는 일을 그대로 시행했다가는 정권이 바뀌어 적폐청산 대상이 될지 모르니, 미심쩍으면 차라리 적당히 뭉개 버리는 게 상책이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청와대의 고위공무원 인사검증에 대비하기 위해 진보이념과 반미적 성향을 입증하기 위한 준비까지 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최고 학벌이 오히려 최고위직 승진에 불리한 요소로 작용한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공직을 민간에 개방한다고 해놓고 채용되는 민간인은 대개 특정 이념집단 출신이다. 주사파ㆍ민변 출신이나 현 정권에 우호적 입장을 보인 민간인들을 골라 대거 해외 공관장에 임명하고 있다. 이들이 주로 선호하는 공관을 차지하니 직업외교관들은 이들을 피해 가기 바쁘다.


정부 산하단체와 공기업, 정부 영향력이 미치는 언론기관들도 적폐청산이라는 명목하에 또 다른 인사적폐가 진행되기는 마찬가지다. 인권보호를 중요한 가치로 내세우는 정권이 공무원들의 비리 의혹엔 휴대폰 제출, 압수수색 등 고강도 조사를 통해 사생활 전반까지 뒤지고 있다. 정책 방향에 대해 공직 내부에서 비판 목소리가 들리기라도 하면, 그 장본인을 색출하는 작업이 진행된다.

그래도 청년실업이 심각한 상황이니 안정된 직장인 공무원의 인기는 유지되고 있다. 다만 일 많이 하는 부서보다는 퇴근 시간이 정확한 여유로운 부서가 더 인기다.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의 대명사가 공직으로 인식되는 경향도 보인다. 국내정치 외풍이 내부 깊숙이 부는 직업공무원제 환경 속에서 자신의 신념은 버리고 이념정책의 추종자로 변신하든지, 워라밸을 추구하는 봉급쟁이로 남든지 선택하게 만드는 상황이다. 군사독재 시절보다도 못한 공직가치와 문화를 적폐청산의 결과물로 내놓을 셈인가. 또다시 고위공직 개혁을 외치며 공수처(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설치를 최대 현안으로 추진하고 있으니, 미래가 더 걱정된다.

최원목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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