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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길의 영화읽기]80년대 여름...소련의 청춘, 절대적 자유 부르짖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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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릴 세레브렌니코프 감독 영화 '레토', 빅토르 최 조명하다

영화 '레토' 스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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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스타 나우멘코·연인 나타샤와 삼각관계 조명…풋풋한 로맨스에 80년대 소련 어두운 면 녹여내
억압된 사회 저항한 러시아 펑크록의 아이콘…한국인 아버지·우크라이나 어머니 이민 3세
비주류 정서 사회 전반 문제의식으로 자라나…구슬픈 선율에 적나라한 가사 담은 음유시인

구슬픈 기타 선율. 낭랑한 음성. 시를 읊는 듯하다. "난 알아, 내 나무가 일주일도 못 간다는 걸. 난 알아, 내 나무가 이 도시에서 죽는다는 걸. 하지만 난 그 옆에 마냥 앉아 있어. (중략) 난 나무를 심었어. 난 나무를 심었어."
빅토르 최가 노래한 '나무'다. 이룰 수 없는 꿈에 다가가는 마음을 표현한다. 절대적 자유를 향한 소련 젊은이들의 갈망이다. 키릴 세레브렌니코프 감독이 연출한 영화 '레토(여름)'는 그 열망을 한가득 품고 있다. 록 스타 마이크 나우멘코(로만 빌리크)와 그의 아내 나타샤(이리나 스타르셴바움), 빅토르(유태오)의 삼각관계를 조명한 드라마다. 풋풋한 로맨스에 음악적 성숙을 덧칠하면서 1980년대 초 소련의 어두운 면면을 자연스럽게 펼친다.

당시 소련은 경제위기에 시달렸다. 물가상승을 감안한 경제성장률이 사실상 제로로 떨어졌다. 행정명령형 경제체제로 인한 물자의 낭비와 비효율성이 극명하게 드러났다. 폐쇄적인 관료체계는 이 위기를 은폐함과 동시에 심화시켰다. 생산량과 경제수치를 조작하고, 힘 있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지하경제를 형성했다. 국가재산을 빼돌려 암거래했고, 서방에서 밀수입한 상품들을 지하에서 고가로 거래했다. 부정부패가 만연하고 범죄와 알코올 중독자가 급증하면서 사회 붕괴의 조짐이 급속히 확산됐다.

영화 '레토' 스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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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토는 체제의 위기를 직접적으로 다루지 않는다. 노래나 일상의 대화로 짐작하게 한다. 나우멘코의 노래 '쓰레기'가 대표적이다. "넌 내 기타를 팔아 코트를 사 입었어. 하루 종일 널 불러대. 미안하지만 난 누군지 몰라. 나도 신경 끊은 지 오래됐거든. 달려, 베이비. 기운차고 용감하게. 넌 쓰레기야." 나우멘코는 개혁을 바라지만 현실도피경향이 짙다. 기타를 치며 '스위트'라는 노래를 부르는 신에서 엿볼 수 있다. "옷 입고 의자에 앉은 채 대낮에 깨어났네. 내 작은 방 벽지를 쳐다보며 밤새 널 기다렸어. 네가 누구와 있었는지 너무 궁금해. 나의 사랑스러운 N." 의문의 남성이 나타나 신랄한 비판을 쏟아낸다. "부르는 꼴은 루 리드, 딜런이네. 그런데 딜런은 베트남을 노래했고, 누명 쓴 흑인 복서를 노래했어. 넌 뭘 부르는 거야? 네 록 앤 롤은 대체 뭔데? 현실에 안주해 있는 멍청한 놈 얘기잖아. 조국이 어떻든 관심은 없고, 바람난 여자 친구나 걱정하는 노래."

빅토르는 나우멘코만큼 서방의 음악에 해박하지 않다. 무대 경험도 없다. 하지만 자신의 음악 스타일을 확고하게 밀어붙인다. 그 색깔은 급진개혁파에 가깝다. 영화에서 두 번째로 부르는 노래 '알루미늄 오이'만 봐도 헤아릴 수 있다. "압정들, 클립들, 널빤지들, 구멍들, 빵들, 포크들. 내 트랙터들이 여기를 지나. 저금통 속으로 갈 거야. 내가 알루미늄 오이를 심은 방수 초원으로 올 거야. 나는 방수 초원 위에 알루미늄 오이를 심고 있어." 반전에 관한 노래다. 알루미늄 오이는 핵무기와 미사일을 상징한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그가 노래한 나무처럼 불가능한 꿈으로도 해석한다. 열매가 나지 않을 걸 알면서도 헛수고하는 행위에 주목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소설 '알루미늄 오이'를 쓴 소설가 강병융은 "인생을 살면서 안 되는 줄 알면서 해야 하는 일들도 있고, 안 되는 줄 알면서 하고 있는 것들도 많다. 하지만 어떨 땐 또 그것이 좋은 결실을 맺기도 한다"고 했다. "헛수고인 줄 알면서도 즐겁게 할 수도 있고, 어쩌면 무의식적으로 그런 일들을 할 수도 있다. 그런 게 우리의 삶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영화 '레토' 스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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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르는 어떻게 저항가수가 되었을까. 숙명이었을지 모른다. 아버지 최동열은 한국인 2세. 어머니 발렌치나 바실리 예브나라도 우크라이나 출신이다. 이민 세대의 후손으로서 비주류의 정서를 이어받았을 수 있다. 가족력에서 비롯된 저항정신은 굴곡진 삶을 거치면서 사회 전반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발전했을 것이다. 빅토르는 열여섯 살에 성적불량을 이유로 세로프미술학교에서 퇴학당했다. 보일러공으로 일하면서 학업을 이어가 중등전문기술대학에 입학했다. 그는 일찍이 경험한 노동자들의 열악한 삶을 록 음악에 담았다. 록의 본질은 자유분방함. 기존질서에 저항적이고, 어떤 규율이나 틀에 매이기를 거부한다. 자기 존재에 대한 충동적 반성과 질문으로 엮어져 나가고 끊임없이 자유지향적이다. 폭발적인 젊음이 좌충우돌해서 구질서에 안주하고 길들여진 사람들에게 충격과 거부감을 불러일으키기 십상이다. 자유, 저항, 충동 등 인간의 보편적인 가치지향을 극도로 억제해온 소련에서는 말할 나위도 없다.

억압된 세계에서 록을 부르는 나우멘코와 빅토르의 음악관은 다르게 그려진다. 나우멘코는 루 리드가 이끈 벨벳 언더그라운드를 좋아한다. 나타샤와의 대화에서 나타난다. "루 리드는 별로야?" "조금 단조롭고 거만하게 들려서 늘 좋진 않더라." "드디어 말하시네. 왜 전에는 말 안했어?" "기분 나빠 할까봐." 적나라하고 퇴폐적이며 난해한 가사가 특징이다. 소음의 도입마저 주저하지 않을 만큼 어둡고 실험적이다. 빅토르의 음악적 뿌리는 비틀즈와 자유로운 정신을 표방하는 펑크록이다. 영화에서 비틀즈 멤버들을 그린 그림을 팔기도 한다. 나타샤와 함께 데이트하는 신에서는 펑크록을 대표하는 이기 팝의 '승객'이 흘러나온다. "나는 승객. 차를 타고 또 타고 도시 곳곳을 모두 누비네. 하늘로 나온 별들을 바라봐. 저 맑고 넓은 하늘. 오늘밤 정말 멋져 보여."

영화 '레토' 스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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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르의 음악은 펑크록 스타일에 러시아 특유의 우울하면서도 아름다운 선율이 어우러져 있다. 펑크록은 1980년대 초반을 풍미하다가 상업적으로 둔갑해버렸다. 일찌감치 서구에서 사라졌으나 소련에서는 개혁과 자유를 노래하는 도구로 오랫동안 최고의 지위를 지켰다. 선봉에는 빅토르가 있었다. 록그룹 대부분이 상업화된 자본주의의 현란한 음악을 추구하기에 급급한 시기에 단순 반복을 줄기로 하는 펑크록 스타일을 고수했다. 노래의 사운드보다 메시지를 더 중시했다. 영화의 엔딩 크레디트를 장식하는 '여름이 끝나간다'에서도 가능성이 희박한 꿈을 간절하게 노래한다.

"난 TV를 끄고 네게 편지를 써. 더는 이 쓰레기를 봐줄 수 없다고. 이제는 힘에 겨워 술에 젖어 살지만 널 잊은 적은 없다고. (중략) 난 답장을 기다려. 오지 않을 답장을. 곧 여름도 끝나겠지. 이 여름도…"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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