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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한詩] 은행나무/곽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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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의 노오란 우산깃 아래 서 있으면
 아름다움이 세상을 덮으리라던
 늙은 러시아 문호의 눈망울이 생각난다
 맑은 바람결에 너는 짐짓
 네 빛나는 눈썹 두어 개를 떨구기도 하고
 누군가 깊게 사랑해 온 사람들을 위해
 보도 위에 아름다운 연서를 쓰기도 한다
 신비로와라 잎사귀마다 적힌
 누군가의 옛 추억들 읽어 가고 있노라면
 사랑은 우리들의 가슴마저 금빛 추억의 물이 들게 한다
 아무도 이 거리에서 다시 절망을 노래할 수 없다
 벗은 가지 위 위대하게 곡예를 하는 도롱이집 몇 개
 때로는 세상을 잘못 읽은 누군가가
 자기 몫의 도롱이집을 가지 끝에 걸고
 다시 이 땅 위에 불법으로 들어선다 해도
 수천만 황인족의 얼굴 같은 너의
 노오란 우산깃 아래 서 있으면
 희망 또한 불타는 형상으로 우리 가슴에 적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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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 시다. 이미 모두 낙엽이 되어 떨어져 버렸지만 그래도 저 은행나무 아래를 걷고 있노라면 자못 신비롭기까지 하다. 저 은행나무는 그리고 저 낙엽들은 알고 있을 것이다. 봄비를 마중 나가던 그 여리고 환한 새싹들의 수줍은 마음을, 세상에 태어나 그 새싹들을 처음 발견하곤 한참이나 우물쭈물하던 꼬마의 설렘을, 여름이 오던 그 밤 첫 키스를 나누던 연인의 아찔한 눈길들을 말이다. 어디 그뿐이겠는가. 어젯밤 살짝 술 취한 아버지가 코트 속으로 붕어빵을 꼬옥 품다가 하나 꺼내 먹은 일도 실은 알고 있을 것이고, 그 서너 시간 전에 원 플러스 원들로 가득한 장바구니를 낑낑 안고 가던 그의 아내의 노곤한 미소도 슬며시 다 보았을 것이고. 그런 사연들이 그런 사람들이 저 아래 소복소복 쌓여 서로 등을 쓸어 주고 덮어 주며 그렇게 도란도란 모여 살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말이다, 이제는 "아무도 이 거리에서 다시 절망을 노래"하게 해서는 안 된다. 정말이지 이제는 "세상을 잘못 읽은 누군가"가 "다시 이 땅 위에 불법으로 들어"서게 해서는 결코 안 된다. 여기는 대한민국이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채상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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