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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진석의 책과 저자] 김승일 시집 ‘프로메테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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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일 시집 '프로메테우스'

김승일 시집 '프로메테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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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대학에 가서 그림을 그리겠다고 결심한 나는, 5월이 되기도 전에 나라는 놈은 아무것도 아니며 진정 재능 있는 미래의 화가들을 불편하게 하거나 자리를 빼앗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철쭉이 만발한 남산에서 한동안 서울 시내를 내려다보다가, “에이 씨X”하고 끝내버렸다.

다음으로 기웃거린 곳이 문사(文士)들의 세계다. 재능이 없음은 분명했으나 현학들을 스승으로 모시고 좋은 선배를 만나 근근이 구차한 글귀나마 적게 되었다. 나의 기웃거림은 지금도 변함이 없거니와 재능과 무관한 객기가 여러 차례 천한 근본을 드러내어 화를 부르기 일쑤다.
대학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시에다 잔뜩 욕을 써놓고 제 아비나 어미를 욕보이는 시인과 마주쳤을 때 한바탕 상소리와 주먹을 앞세워 다툰 적이 있다. 한번은 다른 대학교에서 열린 가을 문학축전에 초대되어 시낭송을 듣다가 불뚝 성을 내 행사를 망쳐버리기도 했다.

한 여학생이 “햇빛이 눈이 부셔 사람을 죽였을 뿐인데, 무어가 그리도 잘못이란 말입니까아~~”라며 웅변조로 읽다가 급기야 눈물을 흘리는 장면에서 더 견디지 못한 것이다. “니미럴 거 별 X같은 꼴을 다 보겠네, 이게 뭔 놈의 시야!”라며 자리를 박차고 나와 버렸다.

타임머신을 타고 다시 그 시간으로 돌아간다면 결코 그렇게 행동하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내가 그 시인이거나 그 여학생이었다면, 그리고 누군가 그 시절의 내 앞에서 내가 한 것과 같은 행동을 했다면 결코 인내하지 않았을 것이다. 말보다 주먹이 앞섰을 것임에 틀림없다.
나는 ‘프로메테우스’라는 제호를 누가 정했는지 알지 못한다. 시인과 편집자가 고심 끝에 결정했으리라. 시집에는 쌍욕과 험한 말이 많이 나온다. 그러니 '프로메테우스'가 시집 전체를 아우를 만한 제목인지는 더 생각해 봐야 알겠다. 어찌 됐든 시집을 손에 쥐었을 때 가장 먼저 목차를 뒤져 페이지를 확인한 다음 표제시를 읽었다.

‘당신과 나의 욕설도/무지막지한 주먹 앞에선 나약한 촛불에 지나지 않는다//분노를 훔쳐라//나는 불씨를 어금니에 물고 있는 어둠이다’ (‘프로메테우스’ 전문·107페이지)

나라면 더 졸여냈을 것이다. 바짝, 그래서 물기가 하나도 남지 않도록. 그렇지만 스타일의 차이를 인정해야 한다. 이 시는 뛰어난 시인의 좋은 시다. 나아가 시집 ‘프로메테우스’는 ‘니미럴!’이라며 책장을 확 덮고 던져버려도 좋을 그런 시집이 아니다.

횃불조차 쉽게 끌 수 있다. 하물며 촛불이랴. 요즘 같은 봄날에 마른 산을 뒤덮어 숲과 민가와 고찰을 송두리째 태워 없애는 대화재의 시작은 거대한 화염이나 폭발이 아니다. 저 깊은 곳에 숨어 있는지 없는지조차 분간 못할 불씨, 그 은밀한 기운이 생동하여 천지에 지옥을 펼쳐 보이는 것이다.

그러니 악문 불씨는 내밀한 기대와 희망, 숭고한 씨앗이며 잇몸 깊숙이 뿌리를 내린 어금니가 간직한 통증에 다름 아니다. 불씨와 냉기, 또는 촛불과 어둠을 병치(倂置)하지 않을 만큼 시인은 세련됐고 상투적인 기술자의 경지에서 멀리 벗어나 있다.

불씨는 프로메테우스의 일부이다. 프로메테우스는 흙을 취하여 인간을 빚되 신의 형상을 베낀 자다. 또한 그 허리를 곧추세워 흙이 아니라 한낮의 태양과 밤하늘의 뭇별을 바라보도록 한 자이다. 아테나가 숨을 불어 넣었으니 인간의 숨결은 신의 호흡이다.

나는 시집 ‘프로메테우스’를 읽기 전에 보도자료를 먼저 받았다. 자료는 시집의 사진과 함께 이메일에 문서로 첨부되어 내게 도착했다. 자료를 주욱 훑어보고 시집에 실린 시편들을 목차로 확인하면서 나는 ‘마그덴부르크의 저녁’이라는 시가 궁금해졌다. 그래서 이런 메모를 했다.

‘시인은 왜 굳이 ‘마그덴부르크’라는 지명을 사용했을까? 독일 작센안할트주의 마그데부르크(Magdeburg)를 네덜란드어로 마그덴부르크(Maagdenburg)라고 표기한다. 어떤 언어든 대충 골라 쓰는 시인은 없다. 시인도 무심하게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시를 읽어본 결과 그냥 네덜란드어 표기를 택한 것 같다. 마그데부르크라고 부르기가 싫었을 수도 있다. ‘n’자 하나만 들어가도 어감이 확 달라지니까. 시는 흥미롭게도 1657년에 있었던 '마그데부르크의 반구(Magdeburger Halbkugeln)'에 대한 실험을 언급한다.

마그데부르크의 시장 오토 폰 게리케(Otto von Guericke)는 자신이 발명한 진공 펌프를 사용하여 대기 압력의 효과를 보여주기 위해 공개 실험을 한다. 구리로 된 두 반구를 맞추고 그 속의 공기를 빼어 진공 상태를 만든 다음 반구를 분리하는 데 필요한 힘을 측정한 실험이다.

반구를 분리하기 위해 양쪽에서 사람이 잡아당기거나 추를 다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실험했다. 그 중 말을 이용한 실험이 가장 유명하다. 게리케가 1672년에 출간한 ‘진공에 관한 마그데부르크의 새로운 실험’은 모든 과정을 상세히 설명한다.

게리케에 따르면, 반구를 분리하기 위해 양쪽에서 각각 말 여덟 마리가 잡아당겼으나 쉽게 떨어지지 않았으며 마침내 떨어질 때는 총성과 같은 큰 폭음이 들렸다고 한다. 과연 진공은 접착제보다 강하며, 이로부터 시의 이미지를 취한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시인은 운동장에 모인 학생들이 양팔을 벌리는 행위, 손끝과 손끝 사이 부는 바람, 뜨거운 물속에서 섞이는 차가운 물, 한쪽 반구에서 다른 반구로 흘러가는 구름들, 혼자가 또다시 혼자가 되는 낙엽과 구름, ‘나의 괄호’를 잇달아 제시한다. 그래서 읽다 보면 가슴이 아파온다.

시는 다음과 같이 끝난다. ‘창밖으로 머리를 내밀어 본다/다리도 내밀어 본다/누가 나를 쥐어뜯는 것 같은데/아무도 없다’. 아무도 없음은 곧 이유 없음일까? 진공과 공허, 부재의 속임수. 어제와 오늘이 펑 소리를 내며 갈라진다면 우스꽝스럽다고 말하겠지만 결국은 울 것이다.

진공 속은 거울 속과 마찬가지로 소리가 없다 (거울속에는소리가없소저렇게까지조용한세상은참없을것이오-이상) 진공과 거울. 아아, 시인은 진공 속에 제 영혼을 비춰 보고 있다! 심해와도 같이 제 영혼을 온전히 비춰 보는 침묵 속의 한 공간에 머무르는 것이다.

시인은 ‘고요한 해저를 어기적거리는/한 쌍의 엉성한 게 다리나 되었으면 좋았을 것을(T. S. 엘리어트)’이라고 노래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새의 울음이 노래인지 비명인지 알 수 없듯이, 김승일 시인의 고통이 마침내 이르는 곳이 어디인지 나로서는 알 길이 없다.

시집 ‘프로메테우스’는 갑각류의 고백이다. 견고한 겉껍질, 험한 언어와 불친절한 가리개를 집게발처럼 휘두르며 ‘함부로 가까이 왔다가는 무사하지 못하리라’고 위협하지만 내면에는 쉽사리 상처를 받고야 말 속살을 숨겼다. 속살은 순결하며 탐욕스런 사냥꾼에게는 향기로운 자양분이다.

시인은 제 살(肉)을 헐어 우리에게 내민다. 선혈이 줄줄 흐르는 것 같지만 (내가 보기에는) 속임수다. 저 선혈은 향신료이거나 소스일 뿐이다. 아프리카의 초원에는 상처 입은 시늉을 해서 사냥꾼을 부르는 새가 있다. 무언가 숨기거나 보호하고 싶을 때, 새는 다친 시늉을 한다.

huhb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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