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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백혜선…1994 차이콥스키 콩쿠르 그후 20여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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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첫 차이콥스키 콩쿠르, 음악 자부심으로 뭉친 관객에 상처
4년 뒤 재도전 1위 없는 공동3위…한국 국적 최고 성적
"10회 콩쿠르 기념 다양한 국적 우승자들이 심사위원"
클리블랜드 음악원 최초 동양인 교수 "극기훈련하듯 노력하는 학생들 영감의 원천"


[인터뷰] 백혜선…1994 차이콥스키 콩쿠르 그후 20여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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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임온유 기자] 1990년 '차이콥스키와 라흐마니노프의 나라' 러시아 모스크바의 차이콥스키음악원. 머리가 새까만 동양인 여성이 피아노 앞에 앉았다. 객석은 음악적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청중으로 가득했다. 곳곳에서 터지는 '같잖다는 듯한' 웃음이 너무 노골적이어서, 연주자는 눈물을 흘렸다. "웬만큼 준비해서 되는 게 아니구나." 피아니스트 백혜선(51)의 첫 차이콥스키 콩쿠르 도전은 그랬다.
4년이 지났다. 같은 장소. 관객은 여전했다. 동양인이 예선 무대에 오를 때면 몇몇은 '볼 필요 없다는 듯' 자리를 떴다. 하지만 백혜선은 달라져 있었다. 텃세에 흔들리지 않았다. 차돌 같은 의지로 예선을 거쳐 결선에 올랐다.

첫 번째 과제는 피아노협주곡 1번 b플랫 단조. 30분짜리 협주곡을 무사히 마쳤다. 관객에 인사하고 숨을 고르기 위해 잠시 무대 뒤로 물러났다. 땀을 닦고 초콜릿 하나를 입에 넣는데 관객의 박수가 끊이지 않았다. '짝짝짝 짝짝짝 짝짝짝 짝짝짝…'. 백혜선은 1994년 제 10회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1위 없는 공동 3위를 했다. 우승 후보로 꼽힌 러시아 피아니스트 니콜라이 루간스키(44), 바딤 루덴코(49)와 함께였다.

백혜선은 1일 오후8시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에서 '2016 교향악축제' 개막 공연을 연다. 요엘 레비가 지휘하는 KBS교향악단과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제2번 c단조를 협연할 예정이다. 그는 지난달 29일 인터뷰를 하면서 차이콥스키 콩쿠르를 "인생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으로 꼽으며 "그때 그 감격은 이루 말할 수 없다"고 했다. 뒷이야기도 들려줬다. "10회 대회를 기념해 다양한 국적의 우승자들이 심사위원을 맡은 점, 4년 전을 떠올리며 또 다시 설사병에 걸릴까봐 라면과 밥솥을 들고 간 일이 모두 내겐 행운이었다"라고 했다.
그해에 백혜선은 지금의 조성진(22), 손열음(30) 못지않은 스타가 돼 한국으로 돌아왔다. 같은 해 스물아홉 나이에 서울대학교 음대 최연소 교수가 됐다. 그로부터 10년 뒤인 2005년 그는 스스로도 '직업적 정점'이라 여긴 그 자리를 내려놓고 미국 뉴욕으로 떠났다. 그는 "엄마, 연주자, 교수 역할을 함께 하기는 벅차다. 연주자로서의 삶에 좀 더 집중하고 싶다"고 했다.

백혜선은 "사실 최고의 대우를 받던 그때의 삶은 여유롭기보단 불안했다. '난 최고가 아닌데…. 이게 끝이라면 내 음악은 어디로 가는 걸까. 아직 인생의 반도 살지 않았는데'란 생각이 들었다. 배워야 할 게 너무나 많았다. 서울대라는 좋은 꼭짓점을 찍고 내려가 음악 인생을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고 했다.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이었다. 아이들을 데리고 간 새로운 삶터에는 백혜선을 위해 준비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금세 자유로워졌다"고 했다. 다양한 예술가를 만나고 그들의 음악에 부딪치며 "'10년 동안 한국에서 말도 안 되는 걸 손에 쥐고 만족하며 살았구나'하고 깨달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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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흘러 백혜선은 이제 '중견 연주자'가 됐다. 그는 지금 미국과 한국 무대를 가리지도 게을리 하지도 않는 여전히 성실한 연주자다. 지난달 23일에는 서울 금호아트홀에서 '사계' 독주회로 관객과 만났다. "연주자에게 '나이듦'이란 와인이 숙성되는 과정과 같다. 젊은 연주자에게선 느낄 수 없는 진하게 우러나오는 맛이 있다. 그게 연륜이고 노련미일 것이다. 손가락이란 도구를 녹슬지 않게 연습하는 일도 빼놓을 수 없지만 이젠 그보단 머리와 마음으로 음악을 떠올리는 일이 더 의미 있는 시간이다."

백혜선은 2013년 9월 클리블랜드 음악원 최초의 동양인 교수가 됐다. 2011년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손열음과 조성진을 누르고 우승한 다닐 트로포노프(25)가 다닌 학교다. "이젠 엄마와 연주자, 가르치는 일을 함께 하기가 버겁지 않느냐"는 물음에 그는 "여전히 힘들다. 하지만 분명 다른 점이 있다"고 했다.

그는 "학생들의 목표가 다르다"고 했다. "내가 서울대 음대에 있던 시절에는 출세나 결혼을 위해 입학한 학생들이 많았다. 진정으로 음악을 원하는 학생은 스무 명 중에 세 명 정도에 불과했다. 불행해 보이는 학생들이 참 많았다. '하고 싶은 게 뭐냐'고 물으면 울면서 마음을 털어놓는 아이들이 있었다." 백혜선은 제자 여러 명을 '그들이 가고 싶은 길'로 보냈다. 변호사가 된 제자도, 치과의사가 된 제자도 있다.

백혜선은 "클리브랜드 음악원은 나를 가만히 있지 못하게 하는 곳"이라고 했다. 열여덟 살, 스물다섯 살 나이와 상관없이 학생들 모두 "음악을 위해 스스로 극기훈련을 택한 사람들 같다"는 것이다. "그 아이들에게 내가 도움이 되기 위해선 스스로를 끊임없이 단련해야 한다. 그들은 나에게 엄청난 영감의 원천이자 자극제, 활력소다."

백혜선의 목소리가 다채로웠다. 환희의 순간을 떠올릴 때는 '관악기'가, 안타까운 이야기를 할 때면 '낮은 음을 내는 현악기'가 됐다. 잘 자라고 있는 아이들에 대해 말할 때는 '타악기'가 됐다. 피아노 같았다. 그는 "피아노 소리만 내는 피아노는 매력적이지 않다. 피아노는 1인 다역을 하며 다른 악기의 흉내를 내는 악기다. 그래서 피아노 하는 사람들이 말이 많다.(웃음) 훌륭한 피아니스트치고 말 못하는 사람을 별로 못 본 것 같다."

백혜선의 교향악 축제 개막 공연 입장권은 일주일 만에 매진됐다. 이번 축제에는 지난해 부조니 콩쿠르 우승자 피아니스트 문지영(21)과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우승자 바이올리니스트 임지영(21) 등이 출연한다. 백혜선은 "젊은 연주자들은 과거의 나보다 더 뛰어나다. 10년, 15년 뒤 우리에게 얼마나 더 큰 것을 선사할지 궁금하다. 클래식은 우리의 마음과 영혼을 어루만져주는 치유와 여유의 음악이다. 젊은 연주자들을 통해 널리 닿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했다.



임온유 기자 ioy@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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