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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썰날 이야기보따리]"니네 회사는 괜찮니? 보너스는?"…직장인 명절증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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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 부러워 하던 조선소 근무하는 K씨 가족들 질문 세례에 설 명절이 괴로워
저유가로 인한 세계경기 침체, 중국 성장 정체
중공업·석유화학에 반도체·LCD산업까지 타격
쇠고기·파·마늘 등 밥상물가도 올라 부담 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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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심나영 기자]국내 빅3 조선소 중 한 곳에 다니는 하지훈(가명ㆍ38)씨는 설을 앞두고 아내와 실랑이를 벌였다. 명절만 되면 늘 본가와 처가에 건네는 봉투에 30만원씩을 넣었는데 이번 설에는 10만원으로 줄이자는 하씨의 제안이 발단이 됐다. 통 큰 아내는 "몇십 만원 더 넣는다고 살림살이에 지장이 없다"고 발끈했지만 하씨의 생각은 달랐다. 연봉에 포함된 설 상여금은 무사히 나왔지만 위축된 심리가 망설이게 했다. 올해 회사 사정은 첩첩산중이다. 회사를 떠나는 동료들을 보면 "나도 언제가는 떠나겠지" 하는 불안감이 엄습한다.

지난해부터 조선업이 적자에 부실 투성이라는 뉴스가 쏟아지면서 명절만 되면 하 씨에게 다들 '위로 아닌 위로'를 건넨다. 하씨는 "큰어머니부터 이제 막 군대에서 제대한 막내 동생까지 회사는 괜찮냐, 월급은 나오냐, 이참에 이직을 하는 게 어떻냐며 다들 한 마디씩 건넨다"며 "걱정을 해주는 건 알고 있지만 이번 명절도 벌써부터 걱정이다"고 말했다.
◆ "대학 들어간 조카 세뱃돈…손이 부끄럽다"

인천에 있는 대기업 계열 중장비 생산업체에 30년 넘게 근무하다 지난해 11월 희망 퇴직한 고성태(가명ㆍ55)씨는 올해 설 차례는 세 살 터울인 남동생 집에서 지내기로 했다. 한 동네에 사는 고 씨의 동생은 초등학교 교감 선생님이다. 고 씨는 "현직에 있는 동생이 그래도 나보다 형편이 낫지 않겠느냐 싶어 부탁했다"며 "조카가 이번에 대학을 들어가 세뱃돈이라도 두둑이 챙겨줘야 하는데 손이 부끄럽다"고 얘기했다.

그가 다니던 직장이 어려워지면서 동네 분위기도 침울하다. 한창 경기가 좋을 때 명절마다 이웃끼리 선물을 주고받던 풍경은 옛 일이 되었다. 1990년 중반 이후 인천 지역의 피아노 공장이 줄줄이 문을 닫았을 때도 지금만큼 위축되지 않았다. 지난해 중장비 공장에서 희망 퇴직자들이 우르르 쏟아지고 첫 명절을 앞둔 지금 "이러다 인천 경기 전체가 타격을 입는 것 아니냐"는 우려만 가득하다. 고 씨는 얼마 전 다니던 회사의 협력 업체로부터 영입 제안을 받았지만 거절했다. 협력 업체도 언제 문 닫을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그는 "설이 지나면 뭐라도 해야 하는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가족 앞에서는 회사니, 경기니 입도 벙긋하는 '모르쇠'도 있다. 지난해 대기업 계열 상선에 들어간 전현미(가명ㆍ29)씨는 시골에 계신 부모에게 드리려고 지난 추석 때보다 더 많은 돈을 준비했다. 전 씨는 그의 부모님께 '대기업에 다니는 자랑스런 딸'이고만 싶다. "요즘 회사가 부쩍 어려워졌다는 말씀은 드리지 않을 생각"이라며 "속앓이는 나 혼자만 해도 된다"고 말했다.

'명절증후군'은 더 이상 며느리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경기가 침체되면서 직장인이나 퇴직자까지 명절증후군을 앓는다. 친척들이 모인 자리에서 "너네 회사는 어떻냐"는 질문에 희망적인 대답을 선뜻 내놓을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설을 앞두고 발표된 경제지표는 바닥이 없다. 산업통상자원부가 발표한 올해 1월 수출액은 367억달러로 작년 같은 달보다 무려 18.5% 줄었다.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에 휩쓸린 지난 2009년 8월(-20.9%) 이후 최대 감소폭이다.

◆경비 불황, 가계 주름살, 서민들의 한숨

저유가로 인한 세계 경기 침체와 중국 성장 둔화로 수출이 줄어 타격을 입은 분야는 조선ㆍ중공업, 석유ㆍ화학 분야가 대표적이다. 이번에는 글로벌 수요 부진에 따라 스마트폰ㆍ반도체ㆍLCD 등 전자부문까지 타격을 입었다. 하 씨처럼 부모님 설 용돈을 줄이거나, 고 씨와 같이 설 차례상을 차리는 데 부담을 느끼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을 것이란 의미이기도 하다.

1월 기업 체감경기는 지난 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 수준으로 나빠졌다. 한국은행이 발표한 '1월 기업경기실사지수'에 따르면 제조업 지수는 지난해 12월보다 2포인트 하락한 65로 조사됐다. 지난 2009년 3월(56)이후 최저치다.

소비심리도 크게 위축됐다. 닐슨코리아가 지난해 4분기 61개국 3만명을 대상으로 온라인 조사를 한 결과, 한국의 소비자 신뢰지수는 46으로 최하위를 기록했다. 100을 기준으로 그 이상이면 낙관적, 이하면 비관적 견해가 우세하다는 뜻이다.

이번 조사에서 한국인의 83%는 '향후 1년 동안 재정상태가 나쁘거나 좋지 않을 것'이라고 답했고, 91%는 '한국 경제가 불황'이라고 진단했다. 앞으로 6개월 동안 가장 관심을 둘 사안으로는 '고용 안정성(29%)', '일과 삶의 균형(27%)', '경제(25%)'를 꼽았다. 이 와중에 식료품과 전ㆍ월세 값은 급등했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설에 많이 쓰는 국산 쇠고기 가격은 지난 1월 14%(전년 같은 기간 대비) 올랐고 양파(117.2%), 파(49.9%), 마늘(41%), 배추(28.6%) 값도 크게 뛰었다. 집세는 지난해 대비 2.9% 상승했다.

이들 수치가 의미하는 것은 명백하다. 경기 불황, 가계의 주름살, 그리고 서민들의 한숨. 차례를 지내고 가족들끼리 둘러앉은 밥상머리에서 "고기 한 근 마음 놓고 살수 없다"는 주부들의 푸념, "다가올 이사철에 전셋집을 못 구해 걱정"이라는 신혼부부의 고민, "구조조정 하는 판에 신입사원을 뽑겠냐"는 취업 준비생의 한숨이 우리를 우울하게 만든다. 부인하고 싶지만, 이것이 남루한 올해 설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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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나영 기자 sny@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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