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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음도 美의 재료다…21C 연금술 '디자인'

최종수정 2016.01.29 11:07 기사입력 2016.01.29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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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미술관 올해 첫번째 기획전 'New Olds'

소은명 작품 '선들'

소은명 작품 '선들'


[아시아경제 오진희 기자] 4층 선반 목재 프레임에 컬러밴드를 둘렀다. 한옥 창살 무늬 같다. 여닫는 문은 없어도 신축성 좋은 컬러밴드가 문을 대신한다. 목재 프레임은 물건을 넣고 꺼내는 행위를 유도하는 수납장으로 탈바꿈했다. 오방색으로 어우러진 색감, 창살 문양이라는 전통적 요소와 밴드라는 현대적 소재를 연결한 디자인이다.

옆에는 웨딩드레스를 만들다 남은 자투리 망사 천을 모아 조명에 활용한 작품이 있다. 천 조각은 분홍색 꽃잎으로 재탄생해 조명 빛을 더욱 은은하게 만든다. 가로로 절반씩 색이 다른 긴 탁자도 보인다. 가까이서 찬찬히 살펴보면 놀라운 사실을 알 수 있다. 쪽빛을 띤 부분은 버려진 청바지 천을 겹겹으로 세워 레진으로 굳혔다. 겹겹으로 세워 만든 결은 나이테를 연상하게 한다. 반대편은 가구로 쓰기엔 질이 좋지 않은 목재들을 모아 역시 레진으로 붙여 탁자의 일부가 되게 했다.

(왼쪽부터)소은명 작가의 수납장 작품 '선들', 한국인 듀오 디자이너 그룹 '패브리커의 웨딩드레스천 활용 조명 제품과 청바지 천과 낡은 목재를 활용한 탁자.

(왼쪽부터)소은명 작가의 수납장 작품 '선들', 한국인 듀오 디자이너 그룹 '패브리커의 웨딩드레스천 활용 조명 제품과 청바지 천과 낡은 목재를 활용한 탁자.


패브리커 탁자 작품 '결'. 청바지 천을 겹겹이 쌓아 레진으로 응고해 탁자의 부분이 되게 했다.

패브리커 탁자 작품 '결'. 청바지 천을 겹겹이 쌓아 레진으로 응고해 탁자의 부분이 되게 했다.


작품들을 보고 있으니 손수 무언가를 만들고자 하는 본능이 꿈틀거리는 것 같다. 지금 당장 집안 구석에 처박혀 쓰이지 않은 물건들, 입지 않은 옷들을 찾아내 실용적이면서도 색다른 어떤 것을 창작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바쁘게 돌아가는 도시민의 일상은 시간과 의지를 제한한다. 창작을 하는 데는 느긋하게 생각할 시간, 상상력, 가시화할 수 있는 재주가 필요하다. 그래서 참신한 디자인과의 만남은 그 자체로 '멈춤'을 선물한다. 그 멈춤으로 과거와 현재를 돌아보게 하고, 쓰임 있는 예술의 시각적인 유희를 만끽할 수 있다.

서울시 관악구 서울대미술관에서 올해 첫 번째 기획전으로 '디자인 전시'가 열리고 있다. 사물에 담긴 '오래됨과 새로움'이라는 측면을 살피고, 둘의 차이와 결합을 주제로 했다. 여기서 '오래됨'과 '새로움'은 유기적인 개념이다. 특히 다양한 함의를 지닌 '오래됨'은 전통으로 이어져 내려오는 '옛' 것의 의미로 기술이나 물건, 관념, 정신, 재료, 가치 등 다양하게 적용된다. 또 다른 의미로는 이미 사용했거나 시간이 흘러 '낡은' 것을 뜻한다.

지난 27일 서울대미술관 전시장을 찾았다. 갈지자 동선(動線)으로 관람할 수 있는 세 층짜리 전시실 전관에 작품들을 대규모로 설치했다. 탁자, 장롱, 의자 등 가구부터 해먹, 조명, 카펫, 도자기 제품 등 총 70여점이다. 우리나라 작가 일곱 명(팀)과 독일, 영국,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등 유럽 국가와 미국 디자이너 마흔 여덟 명(팀)이 참여했다. 전시의 주제는 '뉴 올즈'(New Olds)로, 서울대학교와 독일국제교류처의 협업으로 이뤄졌다. 독일국제교류처는 '전통과 새로움'이라는 테마로 그동안 이스라엘, 중국, 대만, 한국 등을 포함해 현재까지 열네 차례 디자인 전시를 해왔다. 앞으로도 열다섯 나라에서 같은 테마로 국제 전시회를 열 예정이다. 유럽 디자인 작품뿐만 아니라 전시가 열리는 나라의 작품들도 함께 소개하는 점이 특징이다.
독일작가 질비아 크뉘펠의 '옷장'. 실제 옷장이 아닌 스펀지로 옷장 형태를 만든 구조물.

독일작가 질비아 크뉘펠의 '옷장'. 실제 옷장이 아닌 스펀지로 옷장 형태를 만든 구조물.


이번 전시에서 국내 작가들의 작품이 전통의 재해석과 낡은 물건의 재활용이란 부분에서 돋보인다면, 유럽 중심의 서양 작품들은 물건이 지닌 과거와 현재의 중의적 기능에 주목하게 만든다. 크고 두꺼운 책들을 십자형 나사로 연결해 제작한 책장과 바로크 양식의 육중한 장롱처럼 보이지만 실은 가벼운 스펀지로 장롱 형태를 만들어 곳곳을 절개하고 우산, 거울, 접시, 와인 잔, 목걸이 등을 끼어 넣은 설치 작품이 눈에 띈다. 닳아빠진 소파에 은색 테이프를 빼곡하게 붙여 새 제품처럼 만든 작품도 있다. 읽기 위한 책은 책장의 소재가 됐고 스펀지 장롱은 수납이 아닌 물건을 끼우는 역할을 하며 고급스러운 은색 테이프는 접착과 함께 낡음을 새로움으로 변모시킨다.

서양 디자인 작품들을 기획한 독일인 큐레이터 폴커 알부스(Volker Albusㆍ66)는 "이번 전시는 '동시대 제품 디자인에 나타난 과거의 현재화'로 표현할 수 있다. 완성된 제품을 보여 주기보다는 오래된 것과 낡은 것이 현재의 일상에서 융화되는 '아이디어'를 선보이는 것과 같다"고 했다. 그는 한국 디자인 작품을 보고 나서 "이번에 나온 한국작가 작품 중에 컬러밴드 수납장이 잊히지 않는다. 여성 작가가 거대한 목조 구조물에 밴드를 엮어 조립하는 모습이 정말 인상적이었다. 옛 문양과 더불어 오늘날에 맞도록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는 디자인 역시 놀라웠다"고 했다.

주민선 서울대미술관 학예연구사(34)는 "고도화된 산업사회에서 매 순간마다 쏟아져 나오는 제품들은 사용된 뒤에는 폐기물로만 존재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순환이 가능한 '숨'을 불어 넣어줄 수 있는 것이 디자인이며, 이는 바로 낡음이 되어버린 한때의 새로움을 또 다른 현재의 새로움으로 전이시켜주는 작업"이라고 했다.

전통 소반을 활용한 디자인 제품을 소개하고 있는 양웅걸 작가

전통 소반을 활용한 디자인 제품을 소개하고 있는 양웅걸 작가


전시장에서 만난 양웅걸 작가(33)는 우리 전통 소반에 긴 다리를 결합한 테이블을 소개했다. 입식문화로 바뀐 현대 한국인의 생활에 맞춘 제품이다. 도예가와 협업해 만든 개다리소반, 원반, 다각반도 보여줬다. 양 작가는 "원래 목수였다. 오래 전부터 우리나라 소반의 변죽에 매료됐다. 중국의 소반은 곡선이 지나치고, 일본 소반은 곡선이 평평한데 우리나라 소반은 곡선이 은은하다"며 "디자인공부를 하면서 전통을 복원하거나 복제하는 일보다 새로움에 대한 갈망이 더욱 커졌다. 우리 전통 가구와 현대 디자인과의 접목에 관심이 많다"고 했다.

오는 4월 17일까지. 02-880-9504.

오진희 기자 valer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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