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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드리 헵번의 아들이 세월호 숲을?

최종수정 2016.08.08 15:28 기사입력 2016.01.20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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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 가장 영혼이 아름다운 여배우가 타계한 날에

오드리 헵번(사진=영화 '로마의 휴일' 캡처)

오드리 헵번(사진=영화 '로마의 휴일' 캡처)


[아시아경제 김철현 기자] 싹둑 자른 단발머리와 환한 미소, 젤라또 아이스크림을 먹던 스페인 광장, 스쿠터를 타고 달리던 로마의 도로와 콜로세움. 오드리 헵번을 얘기하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영화 '로마의 휴일'의 명장면들이다. 또 많은 이들이 세기의 연인으로 자리매김한 영화 속 그 깜찍하고 청순한 이미지 외에도 깡마른 아프리카 아이들 사이에서 눈물짓던 그녀의 주름진 얼굴도 기억하고 있다. 그녀는 1988년부터 유니세프 친선대사로 베트남, 에티오피아, 소말리아 등 세계 곳곳에서 굶주린 아이들을 위한 구호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쳤고 이 일에 배우로 살았던 때보다 더 많은 열정을 쏟았다.

20일은 여배우 오드리 헵번이 세상을 떠난 지 23년이 되는 날이다. 그녀는 63세를 일기로 스위스 자택에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뒀다. 자식들에게는 자신이 좋아하는 시를 빌어 유언을 남겼다. "아름다운 입술을 갖고 싶으면 친절하게 말하라 / 사랑스러운 눈을 갖고 싶으면 사람들의 좋은 점을 보아라 / 날씬한 몸을 갖고 싶으면 음식을 배고픈 사람들과 나누라… (중략) 아름다운 자세를 갖고 싶으면 혼자 걷고 있지 않음을 명심하라 / 기억하라 만약 도움이 필요하다면 너의 손을 이용하면 된다 / 한손은 너 자신을 돕는 손이고 다른 한 손은 다른 이를 돕는 손이다."

헵번이 남긴 이 말은 그녀의 삶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그녀는 1929년 벨기에 브뤼셀에서 태어났다. 10대 때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굶어 죽을 위기를 겪기도 했다고 한다. 이 때 그녀를 구해준 곳이 유니세프의 전신인 단체였고 이 기억은 훗날 그녀가 구호활동에 뛰어든 계기가 됐다. 뿐만 아니라 헵번은 전쟁 중 반나치 조직에 가담해 활동하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뒤 발레리나가 되기를 원했던 그녀는 영국에서 연극과 영화에 단역으로 출연하면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고 브로드웨이 연극을 거쳐 윌리엄 와일러 감독의 '로마의 휴일'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하루 종일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싶어.", "로마를 꼭 기억하겠어요, 살아있는 한 이곳을 방문한 것을 기억하겠어요." 이렇게 말하는 영화 속 앤 공주를 통해 오드리 헵번은 세기의 연인이 됐다. 이후 '사브리나', '퍼니 페이스', '티파니에서 아침을', '마이 페어 레이디' 등 26편의 작품을 통해 오드리 헵번은 깜찍하고 청순한 이미지를 선보이며 50년대 대표 여배우로 자리 잡았다.

오드리 헵번

오드리 헵번


하지만 많은 이들이 화려한 여배우의 삶을 뒤로하고 은퇴한 후 오드리 헵번의 활동을 두고 진정한 스타이며 내면의 아름다움을 보여줬다고 말하곤 한다. 그녀는 1988년부터 유니세프 친선대사로 굶주린 아이들과 난민 구호를 위해 세계 곳곳을 다녔다. 60세가 넘은 나이에 건강이 악화되면서도 구호활동을 계속할 수 없을까 노심초사 했다고 한다. 그녀는 당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어린이 한 명을 구하는 것은 축복입니다. 어린이 백만 명을 구하는 것은 신이 주신 기회입니다."

그녀의 뜻은 우리나라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오드리 헵번의 아들 션 헵번 페러는 지난해 전라남도 진도군에 세월호 기억의 숲을 조성하겠다고 나섰다. 세월호 기억의 숲은 나무를 심어 희생자를 추모하고 이 같은 일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는 취지에서 기획됐다.
김철현 기자 kc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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