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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기 시집 "착한 애인은 없다네"‥우리 시대의 해학 정신

최종수정 2014.10.23 09:49 기사입력 2014.10.16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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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이규성 기자]
이창기 시인은 1984년 '문예중앙'에 시를, 1990년 '문학과사회'에 평론을 통해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 '꿈에도 별은 찬밥처럼', '李生이 담 안을 엿보다',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다른 저서로 '스무살의 수사학', '김삿갓이라 불리는 사내' 등이 있다. 그의 시는 '삶의 보편적 진실과 본질을 통찰하는 내면의 지도’(이남호)를 보여준다.

9년만에 내놓은 네번째 시집 '착한 애인은 없다네'(창비 출간)는 대부분 산문시로 이뤄졌다. 이번 시집에서는 “인물·사건·배경 등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이야기의 구조”(오형엽, 해설) 속에 알레고리와 몽따주, 인유와 패러디 등 다채로운 기법을 동원하고 있다. 특히 산문시들은 묘사보다는 진술에 가깝다. 해학을 곁들인 풍자가 두드러진다.
"a) 누군가 제멋대로 사용한 흔적이 있다. b) 평소엔 친절하게 응대하다가도 큰일이 생기면 전화를 안 받는다. c) 상담원이 마음에 들지 않고 자주 바뀐다. d) 책상을 내려치면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말을 더듬는다. e) 입소문과 달리 물건의 크기가 왜소하고 볼품이 없다. f) 광고지의 그림처럼 멋진 성충으로 자라 우화하지 않고 계속 애벌레로 지내며 아마존젤리만 축낸다. g) 약정기간 동안 반품을 금지한다는 규정을 고지받지 못한 경우(단 공동 구매자에 한함). h) 발육이 늦고 밤이 되면 불안해하며 문틈을 긁는다. i) 색깔이나 무늬가 마음에 안 든다: 반품설명서의 지시에 따라 라벨을 뜯지 말고 그대로 재포장해 문밖에 놓아두십시오. 택배기사 K"

'민주주의'라는 시의 전문이다. 민주주의란 시장에서 선택할 수 있는 정치 상품 중의 하나로 일방적으로 거래될 뿐이다. 또한 사용자들에게 민주주의는 "밤새 눈 내린 춥고 컴컴한 첫 새벽에 삶은 눌은 밥 한사발 들이켜고 홀로 먼 길 떠난 사람들의 안녕을 비는 이 눈물겨운 족속의 오랜 전통"(겨울 아침의 역사)이다.

"라면이 끓는 사이 냉장고에서 달걀 하나를 꺼낸다. 무정란이다. 껍데기에는 붉은 핏자국과 함께 생산일자가 찍혀 있다. 누군가 그를 낳은 것이다. 비좁은 닭장에 갇혀, 애비도 없이. 그가 누굴 닮았건, 그가 누구이건 인 마이 마인드, 인 마이 하트, 인 마이 소울을 외치면 곧장 가격표가 붙고 유통된다. 소비는 그의 약속된 미래다. 그는 완전한 무엇이 되어 세상 밖으로 날아오르기를 꿈꾸지 않았다.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거나 누군가를 애끓게 사랑했던 기억도 없다. 그런데 까보면 노른자도 있다. 진짜 같다."('시의 시대' 전문)
'착한 애인은 없다네'

'착한 애인은 없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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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시'라는 단어는 민주주의라고도 읽힌다. 그런 '시'는 "전략컨설팅 분야의 세계적인 리더인 보스턴컨설팅그룹에 의해 실행"(오늘의 시) 비밀프로젝트이기도 하다. 우리 시대의 시, 즉 민주주의는 "꼬딱지만 한 땅덩어리를 놓고 아옹다옹하는 국제분쟁 따위는 우습게 여기는 사유의 광대함"(소유와 다국적기업의 기원)으로 형성돼 있다.
이에 시인은 민주주의라는 상품을 서술하기 위해 여러 기법을 혼재해서 사용한다. 시인은 김수영의 '거대한 뿌리'(상록수), '푸른 하늘을'(도토리에 관한 명상), 이상의 '오감도'(통계 속의 아해가 도로로 질주하오), 빈센트 밀레이의 '시인과 그의 책'(시인과 그의 책) 등을 직접적으로 패러디하고 김소월의 '개여울'의 시행을 갖다 쓰고(홀로 벤치에 앉아 도시락을 먹을 땐), 김종삼의 '물통'의 한 구절을 아예 제목으로 차용하기도 한다. 이 또한 시인이 현실을 풍자하는 방식인 셈이다.

"평양냉면을 안 뒤부터는 썩어빠진 대한민국이/괴롭지 않다 오히려 황송하다 역사는 아무리/더러운 역사라도 좋다/진창은 아무리 더러운 진창이라도 좋다//평양냉면을 먹는 동안에는 신자유주의와 금융자본시장을 부러운 눈길로 바라본다 진보와 개혁은 발라내 분리수거하라 주적도, 인문학의 풍토도, G20도, 경제민주화도, FTA도 수육 반접시에 털어넣는다 올겨울 크리스마스캐럴은 한미연합사에 맡겨라."(상록수의 일부)

이번 시집은 전체적으로 냉소와 풍자가 빛나는 만큼 직설의 힘은 미약하다. 결코 희망과 미래를 섣불리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시인은 "이 우울한 시대를 파라다이스처럼 생각"(상록수)하며 "스무살의 눈과 귀는 흐려지고/흰머리 귀밑에 가득"해졌으나 "다시 희망에 대해/가능하지 않은 것에 대해", "다시 묻고 또 물어"(학교에 가자)본다.

이규성 기자 peac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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