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r_progress

아시아경제 최신 기획이슈

[낱말의 습격]단연과 죽로와 시경(106)

최종수정 2014.07.24 07:17 기사입력 2014.07.24 07:17

댓글쓰기

사무실 내 책상 뒤에는 추사 김정희가 쓴 단연죽로시경(端硯竹爐詩境)'이 붙어있다. 후배들은 내가 저게 무슨 뜻이겠느냐고 물으면 슬금슬금 뒷걸음 친다. 내가 그런 불편이나 무안을 주고자 한 것은 아닌데, 공연히 미안하다. 어려운 한자는 별로 없으나 도대체 그냥 읽어서는 풀어내기 어려운 조합이다. 이렇게 보면 된다. 내가 갖고 있는 가장 귀중한 세 가지. 추사는 그것을 저렇게 여섯자로 정리해놓았다.

첫째는 광둥의 단계라는 곳에서 나는 벼루이다. 단계는 중국에서 예부터 4대 벼루 명산지로 꼽히는 곳으로 이곳 벼루는 단단하고 빛깔이 검고 아름답다. 옛사람들은 붓글씨를 쓰는 일이 일상에서 가장 중요한 지적 작업이자 놀이였다. 그러니 멋진 종이, 멋진 붓, 그리고 멋진 벼루가 있어야 한다. 그중에서 돈이 좀 있으면 꼭 가지고 싶어했던 게 저 단계 벼루(단연)이다. 서예에 한 평생을 쏟아부었던 그는 그게 보물 1호라고 적은 것이다.

둘째는 죽로이다. 이것도 중국제인데, 차를 끓이는 화구(火具)로 대나무를 둘러서 만든 것이다. 차의 경전에도 나오는 물건이지만 추사는 굳이 명품을 갖겠다는 뜻이 아니라, 차 끓일 수 있는 난로와 주전자가 꼭 필요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왜 그런가? 차를 마시는 일이야 말로, 지식인이 옛것을 음미하며 학예를 다듬고 스스로를 돌아보는 일에 필수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추사는 차를 좋아했고 좋은 차에 대한 취향이 깊었던 사람이다. 그러니 이것이 목록 2호가 된 것이다.

세째는 시경인데, 이것은 육방옹(육유)이 쓴 글씨로 추사가 청나라 스승 옹방강에게서 그 탁본을 선물받았다. 그것을 귀히 여겨 고향인 예산의 종찰 화암사 뒤편 바위에 글씨를 새겨놓았다. 갖고있는 귀중품 3호는 바로 육유 글씨 탁본이다. 물론 그 자체도 보물이지만 그보다 그 뜻이 더욱 귀하다는 게 핵심이다. 시경(詩境)은 시의 나라, 혹은 시적인 경지를 의미한다. 인간이 시적인 경지를 노닐며 살 수 있다면 얼마나 그윽하겠는가. 세 가지 물건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글 쓰는 일과 차 마시는 일, 그리고 시 쓰는 일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걸 알게 된다.

어느 소도시에서 세 개의 간판이 시골스러운 수다 속에서 나란히 주련처럼 붙어있는 것을 본다. 노래방과 막걸리집과 다방. 이걸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추사의 단연죽로시경과 다를 바 없다는 걸 알게 된다. 글쓰는 일을 이곳 사람들에게 치환해 생각해보면 일하는 것이니 붓에 적실 먹을 공급하는 단연은, 노동의 기력에 기름칠 하는 막걸리 목축이기와 슬쩍 닮았다. 그리고 차 마시는 일은 저 꽃다방에서 해결하면 되고, 시를 쓰는 일은 노래를 하는 것이니 노래방이 적합처가 아닌가. 저 세 가지가 어우려져 삶의 취향과 낭만을 이루는 것이니, 옛날이나 지금이나 다를 바 별로 없다.

'낱말의 습격' 처음부터 다시보기
이상국 편집에디터 isomis@asiae.co.kr

<ⓒ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간격처리를 위한 cla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