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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낱말의습격] 하루살이(99)

최종수정 2014.07.18 06:38 기사입력 2014.07.18 0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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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낙천의 시 중에, 부유(??, 하루살이)를 말한 시가 있다.

오래 살아도 얻은 게 없는 자는
나이 자랑 해봤자 하루살이와 다름없도다
간 사람은 다시 돌아오지 않고
있는 사람은 오래 머물기 어렵도다

長生無得者(장생무득자)
擧世如??(거세여부유)
逝者不重廻(서자부중회)
存者難久留(존자난구류)

하루살이는 입이 없다. 왜 없을까. 먹을 일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입같이 생긴 것이 습기를 빨아들이는 일을 하지만 기능은 그것 뿐이다. 하루 동안 생명을 유지하는데는 먹이가 필요 없다는 점 때문에, 조물주는 그에게 입을 주지 않았다. 하루살이의 성충은 전생애인 하루 동안 교미만 하고 죽는다. 하지만 성충이 되기 전의 시절까지 합치면 1년을 산다. 님프라고 불리는 수생애벌레로 한 해 내내 어른이 되는 꿈을 키우다가, 정작 날개를 펴고 날기 시작하면 그날이 제삿날이 된다.

우리는 그보다 오래 산다고, 훨씬 오래 산다고 자위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지나간 시간을 돌아보라. 아까 있었던 일같은 것들이 수십년 전으로 밀려나 있지 않은가. 낙천의 말씀대로 긴 시간을 살았다 해도, 남는 게 없으면 하루나 뭐가 다름있겠는가. 남는 게 있다 한들 삶의 무상함이 얼마나 달라지겠는가 마는. 하루살이를 보며 비감해지는 것은 삶의 외형적인 시간에 의미를 두고 그것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길게 산다는 것, 오래 누린다는 것이 삶의 근원적인 문제(태어난 자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를 바꿔놓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시간의 길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주어진 시간 안에 살아 숨쉬는 존재 속에 깃든 영원과 무한의 영감에 있지 않을까.
시인 허만하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하루살이란 하루살이 과에 속하는 곤충의 이름이 아닌 것 같다. 그것은 사람이 스스로의 허무에 붙인 이름인 것 같다. 그것은 파스칼처럼 무한을 바라본 자의 인식이다. 그것은 종말을 바라본 자의 인식이다. 나는 보들레르의 '심연'의 첫연 몇 줄을 중얼거려본다. 이 시인이 바라보았던 심연이란 과연 무엇인가. "파스칼은 그의 심연을 가지고 있었다. 자기와 함께 움직이는 심연을. - 아, 우리의 모든 것은 심연이다. 행동도 욕망도, 꿈도, 언어도!" 나는 오늘 말머리 성운의 저켠을 보고 말았다. 그 심연을 바라본 자는 누구나 그 자리에서 한 마리 하루살이가 되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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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편집에디터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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