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겪어봄 직한 상황이다. 친소의 정도, 상황의 경중에 따라 아무렇지 않을 수도, 기분이 나쁠 수도 있다. 전자의 경우 ‘급한 일이 생겼나보군’ 하며 넘어가고, 후자의 경우 ‘저게 나를(또는 나와 보내는 이 시간을) 무시하나?’라며 발끈할 수도 있다. 문제는 물론 후자다. 여기서 경험하는 ‘불쾌’는 다른 감정들과 달리, ‘이깟 일로 기분이 나쁜’ 자신을 격하하게 돼 이중으로 불쾌하다. 불쾌해하는 자신 때문에 또다시 불쾌해지는 것이다.
한국 사회의 모멸감이 어떠한 방식으로 작동하는지 들여다보는 방법은 다양하다. ‘루저’ ‘찌질이’ ‘부러우면 지는 거다’ ‘디스’ 등 신조어들은 자신의 존재 가치를 ‘타인’을 통해 확인받고 싶은 한국인의 지대한 욕구를 반영한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또한 한국어에는 유독 감정과 관련된 용어가 풍부한데, 특히 권력관계에서 벌어지는 행위를 묘사하는 말이 다채롭다는 통찰은 매섭다. 강자의 입장에서는 ‘떵떵거리다’ ‘조지다’ ‘들볶다’ ‘쪼다’ ‘밟다’ ‘콧대를 꺾다’ 등이 있고 당하는 입장에서는 ‘눈치 보다’ ‘눈도장 찍다’ ‘굽실거리다’ ‘코가 납작해지다’ ‘꿀리다’…심지어 ‘깍듯하다’에 함의된 위계는 어떤가!
급속한 ‘개인화’를 바라보는 시각도 흥미롭다. ‘나홀로족’ ‘1인가구’는 늘어나는데 자신의 존재 가치를 자기 스스로 매기는 건강한 개인주의는 아직 뿌리 내리지 못했다. ‘타인’이라는 거울이 없으면 자존할 수 없는 ‘나홀로족’이란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타인의 인정에 신경을 곤두세우다 보면 칭찬과 비난에 일희일비하게 된다. 페이스북에서 ‘좋아요’ 열 번 받다가 댓글 하나가 비위를 건드리면 기분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악플러들은 자신이 올린 글 한 줄에 다른 사람들이 동요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기 효능감(self-efficacy)을 맛본다고 한다. 결핍과 공허를 채우려는 방법 가운데 하나가 바로 타인을 모멸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모욕하고 경멸하면서 나의 존재감을 확인하는 것, 이는 훼손된 자아를 보상받으려는 집단 콤플렉스라 할 만하다. 일부 소수의 ‘잘난’ 사람들만 환대하는 분위기, 누가 자기에게 대놓고 손가락질하지는 않지만 스스로 위축되는 느낌, 심지어 자신조차 그런 시선에 자연스럽게 동의하면서 자격지심에 빠져든 결과다.
그렇다면 모멸감을 뛰어넘어 인간을 존엄하게 하는 삶은 어떻게 가능할까. 저자는 우선 사회구조적인 접근이 요구된다고 말한다. 여기서 ‘품위 있는 사회(decent society)’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구성원들이 자기가 모욕당했다고 간주할 만한 조건에 맞서 싸우는 사회, 또는 그럴 만한 이유를 제공하지 않는 사회다. 이는 궁극적으로는 정치의 몫으로 수렴될 것이다. 한국 사회는 물리적인 피해에는 매우 민감하면서 무형의 폭력에는 둔감한 편이며 모멸의 사회체제는 그런 무딘 감수성과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고 저자는 짚어낸다. 이것이 일상에서 상대방의 입장을 생각하는 것을 넘어 ‘느끼는’ 역지감지(易地感之)까지 나아가야 하는 이유다.
한편 이 책은 ‘모멸감을 쉽게 느끼는 마음’이 모욕을 쉽게 주는 사회만큼이나 위험하다는 경고도 빠뜨리지 않는다. 타인의 인정을 구걸하지 않는 자족, 우열의 통념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개인적 의지가 더불어 요구된다. 유대인 강제수용소에서 물 한 컵을 배급받았을 때 그것을 모두 마셔버리는 사람보다 일부를 아껴 몸을 닦는 데 쓴 사람들의 생존율이 높았다는 증언은, ‘누가 보지 않아도’ 스스로 위엄을 지키는 힘이야말로 삶을 지탱하는 힘이라는 방증으로 잘 알려져 있다.
모멸감의 대척점에 있다고 할 수 있는 ‘명예’는 타인 위에 군림하지 않고도 누릴 수 있는 위엄이다. 영어에서는 무감독 시험을 가리켜 ‘honor system’이라고 하는데, 누가 보든 말든 자기의 양심과 도덕률을 따르는 것이 명예의 본질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나’라는 존재의 뿌리는 누가 욕한다고 비루해지거나 누가 칭찬한다고 드높여지지 않는다는 진리를 깨우치는 동시에 명예로운 자아들이 건강하게 연대된 사회를 꿈꾸게 하는 책이다.
모멸감/김찬호 지음/문학과지성사/1만3500원
이윤주 기자 sayyunju@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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