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때나 무엇에나 한마디 한다고 나서는 치명적 버릇에 걸리지 않게 하소서
"선배는 술자리나 많이 만드시죠."
1년전 기재부 기자실에 들른 첫날, 날 알던 후배들이 던진 말이다. 올드보이란다. 15년만에 세상에 복귀한 올드보이 대수(최민식분)는 과거에 붙잡혀 결국 꼬꾸라졌었지. 알던 후배들은 불편해 한다. 나는 불길한 느낌이 든다.
"최선배 그러면 안돼. 노땅들만 말하고 있어."
기자 여섯명이 함께 점심식사를 하다가 다른 회사 후배가 한 말이다. 후배지만 쉰 살 먹은 부장이다. "밥값 내는 사람은 얘기해도 되잖아." 다들 깔깔 웃는다. 얼마전 일이다. 30대 초반에서 50대 초반까지 나이차가 20살에 달하는 동료기자들끼리 밥을 먹으면서 하는 농들이다.
친구처럼 가깝게 지내는 동료 겸 후배도 여러 명 생겼다. '젊어지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It takes long time to be young)'는 피카소의 어록, 은퇴(retire)는 타이어를 바꿔끼는 시작의 의미라는 얘기도 다른 언론사 후배들에게 배웠다. 100세시대의 공동작업자들이다. 이들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 선후배, 동료기자, 친구. 동호인, 적당한 말이 없다. 나이차가 많이 나도 친구처럼 지내는 관계에 대한 어휘가 마땅치 않다.
이런 관계를 '뜨게친구'로 불러보자. 우리말에 '뜨게부부'가 있다. 결혼하지 않고 동거하는 남녀를 말한다. 부부를 본떳다는 의미다. 나이 차이가 나지만 친구처럼 지내는 게 친구를 본뜬 것이니 뜨게친구라 부를만 하다. 세상은 변하지만 늦게 변하는 게 있다. 서구에서는 다 친구다. 헤이! 유! 라고 부른다. 우리말로 하면 야자다. 우리말엔 존댓말도 있고 장유유서의 전통도 남아 있어 아주 편한 친구처럼 지내기에는 불편할 수 있다. 남아있는 전통과 변화된 관계를 고려해 뜨게친구가 좋을 듯 하다.
나이가 권위일까? 좋은 의미로 얘기해도 나이는 숫자일 뿐이다. '나이'가 '일'을 잘 하도록 만드는게 중요하다. 뇌과학자 이시형 박사는 "제조업에서 지식산업시대로 변하는 때 장년, 당신의 노하우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뒷방 늙은이로 대접 받으려 하지 말고 젊은이들에게는 없는 경험을 현장에서 창의적으로 발전시키라는 충고다.
후배들에게 먼저 다가서기가 쉽지는 않다. 먼저 마음을 열고 다가와 준 다른 회사 후배들이 여러 명 있다. 매우 고맙다. 내 경험을 함께 나누고 현안에 대해서도 얘기하다 보니 가까와졌다. 객지생활의 고생을 함께 나누니 친해진다. 요즘엔 뜨게친구들이 저녁 약속자리에 초대하는 경우도 종종있다. 평소 자주 어울리는 다른 언론사 간부들이 부르는데 약속이 겹쳤다. "애들 노는데 가지 말고 이리와"라고 꼬신다. 나는 옛친구를 버리고 뜨게친구를 선택했다. "팔팔한 애들하고 놀지 냄새나는 노인들하고 왜 노냐"고 답했다.
좀 친해지고 가까와진다 했더니 나쁜 버릇이 다시 나온다. 말이 많아지기 시작한다. "노땅들만 말하고 있잖아"라는 말은 경고다. 귀는 들으라고 항상 열려있고 입은 닫을 수 있게 돼 있는데 귀는 닫고 입은 항상 열려는 게 본성이다. 아니 나이가 들면서 드는 나쁜 버릇이다. 얘기한 사람을 따져보니 6명 중 3명만 얘기하고 나머지 젊은 후배들은 듣기만 했다. 노땅 3명이 입을 닫으니 그때야 모두 참여하는 대화가 시작된다.
뜨게친구가 되려면 말을 아껴야 한다. 어느 17세기 수녀의 기도다. "말 많은 늙은이가 되지 않게 하시고 특히 아무 때나 무엇에나 한 마디 해야 한다고 나서는 치명적인 버릇에 걸리지 않게 하소서." "뱃속에 밥이 적어야 하고 입에 말이 적어야 하고 마음에 일이 적어야 한다"는 법정스님의 말씀도 되새겨 본다.
세종=최창환 대기자 choiasia@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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