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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가 된 레스토랑, '엘 불리'를 마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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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 불리의 요리 '사라지는 라비올리'. 잣 프랄린을 얇은 전분 주머니에 주입한 뒤 라비올리 모양으로 눌러 붙였다. 물에 넣었다 빼면 주머니가 녹으면서 형태가 흩어진다.

엘 불리의 요리 '사라지는 라비올리'. 잣 프랄린을 얇은 전분 주머니에 주입한 뒤 라비올리 모양으로 눌러 붙였다. 물에 넣었다 빼면 주머니가 녹으면서 형태가 흩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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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김수진 기자] 스페인 카탈루냐 로사스 해변가에 홀로 자리잡고 있는 레스토랑 '엘 불리(El bulli)'. '엘 불리'는 전설을 넘어 신화가 된 레스토랑이다. 영국 '레스토랑 매거진'이 선정한 전세계 50대 레스토랑 순위에서 2002년부터 2009년까지 5년간 1위를 차지하는 신기록을 세웠고, 매년 50만명에서 200만명의 예약 요청이 쇄도한다. 그러나 일년에 6개월만 운영하는 이 레스토랑의 최대 수용인원은 고작해야(?) 8000명. 자리가 나기까지 일이년씩 기다리는 건 기본이다. 취재를 하겠으나 자리를 확보해달라는 뉴욕타임스의 요청에 '엘 불리'의 수장 페란 안드리아가 "뉴욕타임스니까 2년만 기다리게 해 주겠다"고 선언한 에피소드는 유명하다.

엘 불리라는 레스토랑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엘 불리는 2000년부터 적자였다. 레시피를 담은 책 등 관련 상품과 페란 안드리아의 외부 강연이 엘 불리의 수입원이었다. 그런데도 엘 불리는 가장 혁신적인 요리를 시도해왔다. 엘 불리는 2000년대 초반 전세계적 트렌드가 됐던 분자요리의 본산이다. 식재료를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맛을 재조직하는 분자요리는 액체질소, 스포이드, 주사기를 주방에 끌어들여 요리의 경계를 확장했다. 그 발원지 중 하나가 엘 불리였다. 어떻게 가능했을까. 13일 개봉하는 다큐멘터리 <엘 불리 : 요리는 진행중>은 엘 불리를 둘러싼 미스테리에 깨달음을 준다.
단적으로 말해 엘 불리는 '요리를 파는' 레스토랑이 아니다. 페란 아드리아라는 '예술가'가 특정 시간과 공간에 구현하는 예술이다. 1987년 엘 불리의 수석셰프 자리에 올라 지금의 명성을 일군 그에게 음식의 맛은 두 번째 고민거리다. "전위적인 레스토랑에 식사를 하러 오는 건 창조적인 감정을 느껴 보기 위해서다. '이거 죽이는데?' 맛이 좋고 나쁘고는 문제가 아니다." 그는 요리를 통한 감각의 일신을 꿈꾼다. 우리의 미각과 후각을 지금껏 알지 못했고 느껴본 적이 없는 영역으로 데려가려는 것이다. 요리는 그 매개체일 뿐이다. 그래서 엘 불리의 요리는 '테크노-컨셉추얼' 요리로 알려져왔다.

영화는 6개월간의 운영을 마친 엘 불리의 남은 6개월을 먼저 쫓는다. 시즌을 마친 아드리아와 요리사들은 바르셀로나의 작은 주방으로 근거지를 옮긴다. 이 주방은 다음 시즌을 위한 실험이 진행되는 실험실이다. 이들은 다음 시즌에 사용할 식재료를 선정하고 각각의 재료들이 지닌 가능성을 탐색한다. 생감, 익힌 감, 오븐에 구운 감, 오일에 절인 감, 감 퓨레를 만들어 맛을 보고 버섯을 다양한 형태로 썰거나 갈아 다지고 깍둑썰어 찌고 굽고 볶고 절이고 진공처리한다. 각각의 모든 특성은 사진과 문서의 형태로 기록되고 요리사들은 토의를 거쳐 어떤 재료를 어떻게 '변형'시켜야 할 것인지 아이디어를 수렴한다.

이 과정을 진두지휘하는 아드리아는 끊임없이 창조성을 강조한다. "우리는 새로운 길을 열어 줄 마법을 찾는 거야...아이디어가 어디서 나올진 아무도 몰라." 실험실에서 요리에 대한 생각은 중요하지 않다. 그건 창의력을 묶어 두는 족쇄다. 중요한 건 요리라는 예술의 질료로서 식재료가 가진 잠재력을 최대로 이끌어내는 것이다. 정작 요리가 결정되는 것은 그 해의 시즌이 시작되기 전의 2~3주 사이다. 개장 준비를 위해 모인 식당 스태프들 앞에서 아드리아는 기성 요리를 잊어버리고 완전히 백지 상태로 시작할 것을 당부한다. "어떤 요리가 나올지 상상이 안 될 겁니다. 우리도 몰라요. 아침에 일어나서 아무 생각도 하지 마세요. 생각해봤자 소용없습니다. 그냥 몸을 맡기면 창조적으로 변할 수 있을 겁니다."
이렇게 탄생된 요리는 그야말로 '상상이 안 되는' 것들이다. '없어지는 라비올리'는 말토덱스트린으로 만든 얇고 투명한 시트를 접어 삼각형 라비올리 모양으로 만든 뒤 주사기로 잣 프랄린을 넣고 열로 눌러 붙인 것이다. 물 속에 넣었다 빼면 전분 성분인 외피가 녹아 찢어져버린다. '민트향 얼음호수'는 얼음으로 된 구 위쪽에 급속냉동한 민트 설탕을 뿌렸다. 위쪽을 바삭바삭 부수어 얼음과 설탕을 함께 먹으면 된다. 이것들은 일반적인 요리의 미덕과 전혀 관계가 없다. 그 대신 테이블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의 놀라움과 경이를 노린다. 아드리아는 라비올리가 '사라진다'는 사실에 감탄하고, 사람들의 이 사이에서 얼음이 부서지는 소리를 요리의 철저한 일부로 친다. 게다가 그는 주방을 거의 떠나지 않는다. 요리마다 끊임없이 맛을 보고 더 나은 결과물을 끌어내기 위해 애쓴다.

지금 엘 불리는 휴업 상태다. 2011년 7월 30일을 마지막으로 영업을 하지 않는다. 예술에 매진한 댓가로 경영난에 빠졌느냐고? 아니다. 엘 불리는 조리기술과 미각을 연구하는 비영리 연구센터인 '엘 불리 재단'으로 재탄생했고, 2014년 재오픈을 예정하고 있다. 영화를 보고 나면, 페란 아드리아와 엘 불리의 요리사들이 평소보다 더 긴 연구기간 동안 대체 어떤 혁신을 빚어낼 것인지 몹시 궁금해진다.



김수진 기자 sj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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