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 불리의 요리 '사라지는 라비올리'. 잣 프랄린을 얇은 전분 주머니에 주입한 뒤 라비올리 모양으로 눌러 붙였다. 물에 넣었다 빼면 주머니가 녹으면서 형태가 흩어진다.
엘 불리라는 레스토랑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엘 불리는 2000년부터 적자였다. 레시피를 담은 책 등 관련 상품과 페란 안드리아의 외부 강연이 엘 불리의 수입원이었다. 그런데도 엘 불리는 가장 혁신적인 요리를 시도해왔다. 엘 불리는 2000년대 초반 전세계적 트렌드가 됐던 분자요리의 본산이다. 식재료를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맛을 재조직하는 분자요리는 액체질소, 스포이드, 주사기를 주방에 끌어들여 요리의 경계를 확장했다. 그 발원지 중 하나가 엘 불리였다. 어떻게 가능했을까. 13일 개봉하는 다큐멘터리 <엘 불리 : 요리는 진행중>은 엘 불리를 둘러싼 미스테리에 깨달음을 준다.
영화는 6개월간의 운영을 마친 엘 불리의 남은 6개월을 먼저 쫓는다. 시즌을 마친 아드리아와 요리사들은 바르셀로나의 작은 주방으로 근거지를 옮긴다. 이 주방은 다음 시즌을 위한 실험이 진행되는 실험실이다. 이들은 다음 시즌에 사용할 식재료를 선정하고 각각의 재료들이 지닌 가능성을 탐색한다. 생감, 익힌 감, 오븐에 구운 감, 오일에 절인 감, 감 퓨레를 만들어 맛을 보고 버섯을 다양한 형태로 썰거나 갈아 다지고 깍둑썰어 찌고 굽고 볶고 절이고 진공처리한다. 각각의 모든 특성은 사진과 문서의 형태로 기록되고 요리사들은 토의를 거쳐 어떤 재료를 어떻게 '변형'시켜야 할 것인지 아이디어를 수렴한다.
이 과정을 진두지휘하는 아드리아는 끊임없이 창조성을 강조한다. "우리는 새로운 길을 열어 줄 마법을 찾는 거야...아이디어가 어디서 나올진 아무도 몰라." 실험실에서 요리에 대한 생각은 중요하지 않다. 그건 창의력을 묶어 두는 족쇄다. 중요한 건 요리라는 예술의 질료로서 식재료가 가진 잠재력을 최대로 이끌어내는 것이다. 정작 요리가 결정되는 것은 그 해의 시즌이 시작되기 전의 2~3주 사이다. 개장 준비를 위해 모인 식당 스태프들 앞에서 아드리아는 기성 요리를 잊어버리고 완전히 백지 상태로 시작할 것을 당부한다. "어떤 요리가 나올지 상상이 안 될 겁니다. 우리도 몰라요. 아침에 일어나서 아무 생각도 하지 마세요. 생각해봤자 소용없습니다. 그냥 몸을 맡기면 창조적으로 변할 수 있을 겁니다."
지금 엘 불리는 휴업 상태다. 2011년 7월 30일을 마지막으로 영업을 하지 않는다. 예술에 매진한 댓가로 경영난에 빠졌느냐고? 아니다. 엘 불리는 조리기술과 미각을 연구하는 비영리 연구센터인 '엘 불리 재단'으로 재탄생했고, 2014년 재오픈을 예정하고 있다. 영화를 보고 나면, 페란 아드리아와 엘 불리의 요리사들이 평소보다 더 긴 연구기간 동안 대체 어떤 혁신을 빚어낼 것인지 몹시 궁금해진다.
김수진 기자 sj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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