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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업주DNA]식민 청년의 분노 '제철보국'뜨거운 불 지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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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계 100년-미래경영 3.0 창업주 DNA서 찾는다
<14> 동국제강 장경호 회장ⓛ

3·1운동 참여 '경제부흥'만이 살길 다짐
국가경제 기여 위해 54년 동국제강 설립
국내 민간 최초 선재 일관생산체제 구축

[아시아경제 채명석 기자] 현재의 젊은이들에게는 낯선 이름일지 모르지만 동국제강은 우리나라 철강산업의 서막을 올린 기업이다. 창업주인 대원(大圓) 장경호 회장(이하 장경호)은 77세 삶 전부를 온통 철강사업을 통한 제철보국 실현에 바친 선굵은 인물이다.
◆3ㆍ1운동 참가= 장경호는 1899년 9월 7일 인동(仁同) 장시 남산파 31대손으로 부산 동래군 사중면 초량동에서 태어났다. 부친 장윤식, 모친 문염이의 네 아들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을 지금의 부산시 동구 초량동 207번지로 기록되고 있는 중앙시장 뒤 청과시장 근처에서 보냈다.

그가 태어날 당시 우리나라는 을사보호조약과 한일합방이라는 피맺힌 한에 울부짖어야 했던 암흑기였다. 나라 안팎에서는 민족의식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부농이었던 부모 밑에서 평범하게 살던 그가 민족의 아픔을 깨달은 계기는 1912년 서울 유학길에 올라 보성고등보통학교(현 보성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다. 일본인들의 갖은 만행을 보면서 눈물의 학창시절을 보낸 그는 졸업 후 1919년 3ㆍ1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이 일로 일본 경찰에 쫓기게 된 그는 수사망을 피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1년여의 외지생활. 일제 치하를 극복하기 위해 고민을 거듭한 후 청년 장경호가 내린 결론은 '경제부흥'이었다. 이를 실천하기 위해 그는 공부를 중단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대궁양행'과 '남선물산'= 일본에서 돌아온 그는 맏형 장경택이 일하는 목재소에서 일하는 틈틈이 큰형과 대농이었던 둘째형 장경수에게 가마니를 공급해주는 가마니업을 하면서 10년여간 경영의 기초를 배웠다. 이어 새로운 사업을 모색하고 있던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이 쌀가마니 수입이었다. 추수를 하는 가을철에는 귀한 물건이지만 봄이나 여름철에는 쓸모없이 흩어져 있는 가마니를 보면서 '저걸 수집해 놓았다가 팔면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마침내 그는 1929년 첫 회사인 '대궁양행(大弓洋行)을 설립한다. 일본인들과의 치열한 경쟁속에서도 언제나 농민들에게 가마니 값을 제대로 쳐주는 등 겸손함으로 수완을 발휘했다. 헐벗고 굶주린 농민들의 아픔을 함께 하기 위해 하루 한끼, 많이 먹으면 두끼를 먹으면서 고통을 나눴다.

일제의 쌀 공출과 군수물자 수송에 필요한 가마니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자 장경호는 서른 일곱 살 때인 1935년 '남선물산(南鮮物産)'을 설립해 사업을 확장했다. 부산 광복동에 자리잡은 남선물산은 가마니공장 외에도 수산물 전국도매업과 미곡사업, 정미소 경영, 양철로 석유깡통을 만드는 제조업에도 착수해 크게 번창했다.

◆철과의 만남 '조선선재' 설립= 1949년, 기업가 장경호는 일생을 뒤바꾸는 기회를 만나게 된다. 광복후 남선물산 창고 한쪽을 임대해 신선기(伸線機)를 설치하고 철사와 못을 생산하던 제일동포가 화재를 만나 운영난에 빠지자 장경호에게 기계를 인수해줄 것을 부탁한 것이다. 사업의 변화를 직감한 장경호는 인수를 했고, 6.25 전쟁 1년전 설립한 회사가 바로 동국제강의 모태인 '조선선재(朝鮮線材)'였다.

전쟁 발발 후 남한에 있던 철강시설이 거의 사라져 버린 상황에서 조선선재는 전쟁의 피해를 받지 않은 부산에 위치한 덕분에 철선과 못을 생산해 큰 돈을 벌었다. 이때 모은 돈이 바로 동국제강의 창업기반이 됐다. 훗날 장경호는 "자원이 없는 나라에서 한 조각 고철이라도 열심히 모아, 이를 녹여서 민생에 조그만 도움을 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회고했다.

◆동국제강 설립, 민간 철강업의 시작= 50대 중반의 나이에 접어든 장경호는 1954년 7월 서울 당산동 4가 91번지에 '동국제강(東國製鋼)'을 설립했다. 동국제강 설립 전 장경호는 앞으로의 사업은 자손들도 긍지를 갖고 이어받을 수 있는 사업, 국가경제에 기여할 수 있는 애국사업을 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바로 쇠를 다루는 사업, 즉 철강사업이었다.

조선선재로 철강사업 경험을 쌓은 장경호는 영등포에 있던 한국특수제강을 인수함으로써 동국제강을 완성했다. 동국제강의 출범으로 한국철강공업의 역사는 비로소 현대적 민간 철강공업의 태동을 맞는다.

당시 철강업계의 초미의 과제는 국토재건운동으로 인해 불어나는 못과 선재의 수요를 감당하기 위한 중간소재인 와이어 롯드(Wire rod)를 생산할 소재공장을 건설하는 일이었다. 자본금 1000만환, 종업원 40명으로 출발한 동국제강은 1954년 8월 20일부터 당산동 공장에서 본격적인 철강소재 생산에 들어갔다. 이것은 동국제강 역사에서 최초의 공장과 첫 생산으로 기록된다. 동국제강 당산동 공장의 1955년도 주요시설과 장치들은 기록에 이렇게 남아 있다.

"절단기(2호, 3호) 각 1대, 횡형 신선기 12대, 수동 신선기 12대, 6자(尺)형 직결선반기 1대, 볼 반(18치), 전동기 3대, 12자형 평삭기 1대, 고압송풍기 2대, 제정기 4대, 마이크로미터 1개, 계근기 1대."

동국제강의 출발은 조촐했으나 성장세는 가파랐다. 1959년에는 선재(와이어 롯드), 1961년에는 철근 생산을 시작했다. 못을 만드는 소재인 와이어 롯드의 생산능력은 연산 4만t 규모였다. 현재 규모로 본다면 유아기 형태였지만 민간자본만으로 중간 소재인 롯드를 국내 최초로 공급해 선재 제품을 일관 생산체제로 구축한 것은 장경호의 미래를 내다보는 눈과 결단, 신념 없이는 불가능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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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명석 기자 oric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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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명석 기자 oric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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