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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나무와 사람] 400살 느티나무 '천년의 愛民'을 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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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백성을 먼저 보살핀 고려 개국공신 지팡이의 전설…부여 가림성 느티나무

고규홍 나무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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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콘텐츠 제작자들에게 각광받는 나무 가운데 하나인 부여 성흥산 꼭대기에 서 있는 느티나무가 천연기념물로 지정 예고됐다. ‘사랑나무’라는 이름으로도 많이 알려진 나무다. 나무도 나무지만 나무 주변의 풍광이 더없이 아름다워 사진가는 물론이고, 영화 제작자들도 촬영지로 첫손에 꼽는 아름다운 나무다.


해발 300m가 채 안 되는 마을 뒷산인 성흥산의 산성터에 서 있는 나무여서 오래도록 ‘부여 성흥산성 느티나무’라고 불러왔지만, 10년쯤 전에 산성 유적 발굴작업 과정에서 ‘삼국사기’의 ‘백제본기’ 제24대 동성왕조에 "8월에 가림성을 쌓고 위사좌평 백가로 하여금 이를 지키게 하였다"라는 기록을 발견, ‘가림성’이라는 성의 이름을 확인해 ‘부여 가림성 느티나무’라고 부르게 됐다. 그러나 여전히 ‘성흥산성’이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부를 뿐 아니라, 실제로 웬만한 내비게이션에는 ‘성흥산성’으로 검색된다.

나무와 주변 풍광이 고루 아름다워
부여 관광객 필수코스된 '사랑나무'
고려 개국공신 유금필 장군의 지팡이가 자랐다는 전설을 품고 살아온 부여 가림성 느티나무.

고려 개국공신 유금필 장군의 지팡이가 자랐다는 전설을 품고 살아온 부여 가림성 느티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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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가림성 느티나무’는 한 그루의 느티나무로서 무척 아름다운 나무이며, 주변 경관도 매우 수려하나 천연기념물로 지정한 우리나라의 느티나무 18그루 가운데에 규모에서는 비교적 작은 나무에 속한다. 수령 400년, 높이 22m, 가슴높이 줄기 둘레 5.4m 규모에 불과하다.


규모를 바탕으로 보아 천연기념물의 가치가 있는가에 대해 이견이 없는 것도 아니다. 여기에서 천연기념물의 의미를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천연기념물은 살아 있는 생물에 국가가 부여하는 최고의 지위다. 그렇다면 천연기념물은 어떤 기준으로 지정하는가도 살펴보아야 한다. 물론 규모가 크고 형태가 아름다우며, 더불어 해당 생물종의 전형적인 형태를 갖추었느냐 하는 건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이건 천연기념물이 갖추어야 할 필요조건일 뿐이다.


천연기념물 지정 조건에는 규모를 이야기하는 ‘생물학적 가치’ 외의 가치를 함께 살펴야 한다. 무엇보다 인문역사적 가치가 인정돼야 한다. 천연기념물을 국보 보물 명승 등과 같은 문화재로 분류하고, 이를 문화체육관광부의 문화재청에서 관리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즉 천연기념물은 단순 생물이 아니라 인문적 가치를 가지는 문화재인 자연유산이라는 것이다.

천연기념물 지정 앞두고 이견 있지만
인문학적 가치 지닌 문화재로 보아야
나무만으로도 아름답지만, 나무에서 내다보는 풍광은 더 없이 훌륭하다.

나무만으로도 아름답지만, 나무에서 내다보는 풍광은 더 없이 훌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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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부여 가림성 느티나무를 천연기념물로 지정하게 된 평가 기준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이 느티나무에는 오래도록 마을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오는 특별한 전설이 있다. 성흥산 가림성에 주둔하던 유금필(庾黔弼·? ~ 941) 장군이 짚고 다니던 지팡이가 자랐다는 이야기다.


사람이 짚고 다니던 지팡이가 큰 나무로 자랐다는 이야기도 과학적 근거를 찾기 어렵지만, 그럴 수 있다 해도 문제는 남는다. 유금필은 고려 개국 과정에서 큰 공을 세운 인물로, 그가 활동한 시기는 1100년 전이니, 그와 관련 있는 나무라면 1100년은 넘어야 한다. 그러나 이 나무의 수령을 생물학적 기준으로 측정하면 400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앞뒤가 맞지 않는다.


나무의 크기나 모양을 아무리 뜯어보아도 그만큼 오래된 나무로는 믿어지지 않는다. 다른 곳에서 자라는 느티나무들과 비교해 볼 때, 아무리 많이 잡아도 400년 정도로 보는 게 온당하다. 산꼭대기라는 불리한 생육 조건을 감안해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금필 장군의 지팡이 전설은 이 지역 사람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유효하다.


그래서 다시 전설의 의미를 짚어보게 된다. 전설은 한 시대에 실현해야 할 가치를 비유와 상징으로 표현하는 메타포다. 즉 과학의 잣대로 전설의 사실 여부를 재단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다.


땅에 꽂은 지팡이가 나무 됐다는 전설
고된 백성 보살핀 유금필 장군 공덕
오래오래 기리려는 백성의 뜻 아닐지
땅 위로 솟아나 꿈틀거리며 뻗은 신비로운 형상의 뿌리 부분.

땅 위로 솟아나 꿈틀거리며 뻗은 신비로운 형상의 뿌리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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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유금필 장군의 지팡이 전설은 어떻게 이루어져서 오래도록 유효한지를 살펴볼 필요가 생겨난다. 유금필 장군은 후백제를 물리치고, 고려 임금인 태조를 만나러 가는 길에 이곳 가림성에 머물렀다고 한다. 그때 이 마을은 후백제의 패잔병들이 무시로 나타나 노략질을 일삼는 바람에 살림살이가 고통스러웠다. 덧붙여 전염병과 흉년까지 겹쳤다고 한다. 고통 속에 살아가는 백성의 상황을 살펴본 유금필은 군사들을 위해 마련해 둔 군량미를 나눠주는 극단의 대책으로 백성의 삶을 배려했다. 끼니를 잇지 못하던 마을 사람들은 장군의 성의가 눈물겹게 고마웠다. 흉년의 고비를 넘기고 얼마 뒤 마을 사람들은 유금필의 공을 오래도록 잊지 않기 위해 사당을 세웠다. 살아 있는 사람을 기리는 생사당이었다. 생사당은 조선시대에 들어와 권세가들이 자신의 활동을 과장하기 위한 상징으로 짓곤 하던 부패의 온상으로 변질됐지만, 유금필 장군의 생사당은 순전히 마을 사람들이 정성을 모아 지은 순수한 생사당이었다.


무너앉기 직전의 삶을 따뜻하게 보살핀 장군의 선한 베풂은 마을 사람들에게 더없이 소중했다. 어진 장군의 이야기는 입에서 입으로 대를 이어 전해졌을 것이다. 부여 성흥산 부근의 마을은 후백제 지역이었으니, 엄밀히 따지면 유금필 장군은 마을 사람들의 일상을 파괴한 점령군의 수장이다. 그러나 생과 사를 오가는 위기를 넘게 해준 장군의 배려는 백성들의 마음 깊은 곳에 감동으로 남았다.


땅 위로 솟아나 꿈틀거리며 뻗은 신비로운 형상의 뿌리 부분.

땅 위로 솟아나 꿈틀거리며 뻗은 신비로운 형상의 뿌리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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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금필 장군의 이야기가 대를 잇고 전해오는 와중에 가림성터 가장자리에 우뚝 서 있는 나무를 바라보며 후대 사람들은 자신들의 사람살이를 이어오게 한 그를 떠올렸을 것이고, 급기야 장군이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아둔 것이라는 전설이 덧붙여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전설의 형태로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몸 바쳐 싸우면서도 백성을 먼저 보살핀 장군의 큰 뜻을 오랫동안 남기고 싶었던 결과다.


‘부여 가림성 느티나무’는 단순히 느티나무로서의 생물학적 가치만이 아니라, 나무를 바라보며 살아가는 이 지역 사람들의 사람살이를 지켜온 소중한 자취를 간직한 자연유산이다. 단순한 자연물이 아니라 인문학적 자산이 담긴 자연유산이라는 점이 천연기념물로 지정할 가치로 인정된다는 이야기다. 천연기념물로 지정 완료되기까지 몇 가지 사소한 절차가 남았지만 큰 문제 없이 완료될 것이다.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 400살 느티나무 '천년의 愛民'을 품다 원본보기 아이콘

여기에 중요한 이야기가 하나 남았다. 바람막이 하나 없는 산꼭대기에 홀로 우뚝 선 환경은 나무의 생육에 혹독한 조건이다. 실제로 나무는 지난 10여년 사이에 서쪽으로 난 큰 가지가 부러져 전체적인 수형이 적잖이 망가졌다. 여전히 아름다운 나무이기는 하지만, 예전의 수형이 보여주던 수려함에는 못 미치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게다가 워낙 나무가 일반에게 널리 알려지다 보니, 나무를 찾아오는 관광객이 무척 많은 편이다. 특히 부여 가림성 느티나무는 전체적인 수형 못지않게 ‘판근(板根)’이라고 부르는 땅 위로 솟아오른 뿌리 부분이 무척 아름답다. 그러나 나무를 찾아오는 거개 관광객들은 이 판근 위에 올라서서 사진을 촬영하곤 한다. 나무의 생육에 좋지 않은 영향을 남길 건 불 보듯 뻔한 일이다. 그렇다고 울타리를 세워 접근을 막자니, 경관이 망가질 것이고, 관리소를 상시로 운영하는 일 역시 쉬운 일이 아니다. 하릴없이 지자체와 관계자들의 대책보다 나무를 찾아오는 관광객들의 의식 수준에 기대는 수밖에 없다는 게 불안하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온전하게 오래 보존돼 또다시 천년의 세월 뒤까지 인문학적 가치를 품은 자연유산으로 살게 하느냐 하는 것은 우리 국민의 인식과 태도에 달려 있다. ‘부여 가림성 느티나무’는 이 시대 우리 국민의 자연유산에 대한 인식 태도를 가늠할 중요한 척도로 남을 것이다.


고규홍 나무칼럼니스트




최동현 기자 nell@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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