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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그날엔…] 버스표, 반지, 막걸리 매상…1987 백기완 'TV 연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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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후보 백기완 TV연설 비용, '십시일반' 모금으로 마련
YS-DJ에 연립정부 촉구, 양김 분열로 노태우 후보 당선

[아시아경제 류정민 기자]

편집자주‘정치, 그날엔…’은 주목해야 할 장면이나 사건, 인물과 관련한 ‘기억의 재소환’을 통해 한국 정치를 되돌아보는 연재 기획 코너입니다.

[이미지출처=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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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1987’은 한국 현대사의 전환점인 1987년 민주화운동이 배경이다. 군부 독재 타도를 위해 아스팔트를 뜨겁게 달궜던 평범한 이들의 함성이 세상을 바꿔놓은 이야기다. ‘호헌 철폐, 독재 타도’의 사박자 구호가 연일 대학가 앞마당을 수놓았고 매캐한 최루 연기가 코 끝을 울렸던 시절이다.


국민들이 당시 정부에 요구했던 대표적인 사안은 우리 손으로 대통령을 뽑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지금은 너무나 당연한 국민 투표를 통한 대통령 선출이 당시에는 수많은 사람의 염원이었다.

이른바 6·29 선언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 현실화하고 1987년 12월 국민들은 자신의 손으로 대통령을 뽑을 기회를 얻었다. 당시에는 김영삼(YS), 김대중(DJ)이라는 제도권 정당의 걸출한 정치지도자들이 있었다.


호남과 서울을 지지기반으로 하는 평화민주당의 김대중 후보, 부산 경남의 정치적 맹주인 통일민주당의 김영삼 후보에 충남의 절대 강자 신민주공화당의 김종필 후보까지 이른바 ‘3김 후보’들이 대선에 도전했던 해이다.


제도권 정당 밖에서는 선명한 진보 가치 노선을 내건 ‘민중 후보’가 대선 도전에 나섰다. 노동자, 농민, 학생, 도시 빈민 추대를 받아 대선 출마를 선언한 통일운동가 백기완이 주인공이다.

[이미지출처=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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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 8번 민중후보 백기완의 1987년 대선 도전은 한국 정치사에 기록될 장면이었다.


백기완 후보는 청년 학생 조직의 열렬한 지지와 재야 단체의 지원을 받으며 대선 레이스에 뛰어들었다. 전국의 수많은 대학생들이 자원 봉사자로 나서면서 주요 정당 후보의 탄탄한 조직력에 맞섰다.


문제는 돈이었다. 대선 출마는 후보자 등록부터 선거운동, 홍보물 발송에 이르기까지 많은 돈이 들 수밖에 없는 선택이다. 백기완 후보의 대선 출마는 ‘가치의 전파’가 주된 목적이었다. 왜 대선에 나섰는지, 한국사회 문제의 원인은 무엇인지, 자신의 해법은 무엇인지에 대한 ‘생각’을 대중에게 알리는 게 중요했다는 얘기다.


대선 후보들이 이러한 생각을 대중에게 가장 손쉽게 전할 수 있는 방법은 ‘TV 연설’이었다. 문제는 대선 후보 TV 연설을 위해 적지 않은 ‘돈’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1987년에도 대선 후보 TV 연설 비용은 만만치 않았다. 백기완 후보의 TV 연설 참여는 그 자체로 영화의 한 장면이었다.


[이미지출처=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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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기완 후보는 1987년 대선 TV 연설에서 그 사연을 전했다.


“오늘 다시 여러분에게 이런 말씀을 드릴 기회는 사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TV 연설에서) 20분 동안 내가 얘기하는 값이 무려 5500만원이다. 1초가 지나가는 동안 4만6000원을 내야 한다. 이 민중 후보가 어디 그런 큰돈이 있습니까. 바로 어제 대학로에서 군중집회를 크게 열었는데 딱한 사정을 호소했더니 여러 국민이 성금을 내서 이렇게 나오게 됐다.”


백기완 후보에게 후원을 전한 이들은 누구였을까.


“어떤 사람은 1000원 짜리, 1만원 짜리를 내는 사람도 있었지만, 반지에 시계를 풀어주기도 하고 또 그 주변에서 막걸리 장사하던 양반은 그날 매상으로 31만1000원을 몽땅 털어주기도 했고 가난한 학생은 돈이 없다고 버스표를 내기도 하고 또 노동자는 쪽지를 적어서 격려하기도 하고 전경도 돈을 내는 경우를 봤다.”


백기완 후보는 국민의 성금으로 TV 연설을 하게 됐으니 솔직하게 자신의 얘기를 해보겠다면서 거침없는 연설을 이어갔다.


“전두환씨와 노태우씨가 무엇이 다릅니까. 광주에서 양민을 학살한 사람 아닙니까. 누가 발포 명령을 내렸습니까. 그 책임자는 누구입니까. 민족의 양심의 이름으로 심판해 감옥에 쳐 넣어야 합니다.”


1980년대 서슬 퍼런 전두환 정권 시절, 백기완 후보의 거침없는 메시지는 방송 전파를 타고 전국에 울려 퍼졌다.


[이미지출처=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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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기완 후보는 YS와 DJ에게 재야 민주화세력을 하나로 뭉치는 방법을 논의하자면서 정치회담을 제안했다. 연립 정부를 촉구하는 총궐기 투쟁을 예고하기도 했다. 1987년 대선은 특정 정치인의 승패를 가리는 자리가 아니라 6월 민주화운동의 성과를 계승하는, 그 결실을 국민과 함께 나누는 자리가 돼야 한다는 의미다.


백기완 후보의 호소에도 YS와 DJ는 각자의 길을 걸어갔다. 결국 백기완 후보는 1987년 12월14일, 대선을 이틀 남겨놓은 시점에 사퇴를 선언했다. 백기완 후보는 사퇴 당시 특정 후보 지지여부는 밝히지 않았다. YS와 DJ의 정치적 결단을 촉구하는 마지막 승부수였다.


하지만 YS와 DJ는 단일화에 실패했고 12월16일 대선을 맞이했다. 그날 최종 승자는 민정당 노태우 후보였다. 양김의 분열이라는 선거구도는 민정당 대선 승리의 밑거름이었다. 노태우 후보는 36.64%라는 저조한 득표율을 기록했지만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YS와 DJ는 각각 30%에 가까운 득표율을 기록했지만 표가 분산됐고, 민정당의 재집권을 지켜봐야 했다.


1987년 대선은 그렇게 끝났다. 수배와 투옥, 고문의 시련 앞에서도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를 대변하고자 했던 인물, 백기완은 이제 세상에 없다. 지난 15일 그가 세상을 떠나자 정치권과 시민사회, 학계, 문화 예술계에 이르기까지 각계에서 애도의 목소리가 이어지고 있다. 백기완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그는 세상에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을까.


1987년 TV연설을 통해 그는 이렇게 말했다.


“민주주의 딴 거 아니다. 양심 있고 능력 있는 사람이 살 수 있는 세상을 ‘맹그는’ 것이 민주주의다.”




류정민 기자 jmryu@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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