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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길의 가을귀]말레이반도에 고무 이식한 '보이는 손'

최종수정 2019.10.18 10:10 기사입력 2019.10.18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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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길의 가을귀]말레이반도에 고무 이식한 '보이는 손'


말레이시아는 세계 천연고무 생산량의 약 40%를 차지한다. 애초 말레이반도에 생고무는 전무했다. 영국이 19세기 말 아마존에서 다생하던 고무나무를 이식했다. 고무가 새로운 산업의 핵심 소재로 부상할 거라고 판단했다.


찰스 매킨토시가 개발한 방수포에서 확신을 얻었다. 그는 두 겹의 헝겊 사이에 나프타(석유ㆍ코르타르 등을 증류해 얻는 탄화수소 혼합물)로 처리한 고무를 끼어넣는 방법을 고안했다. 고무로 방수 코팅된 우비와 코트를 제작해 세계 방수코트 시장의 90%를 점유했다.


사실 매킨토시의 나프타 처리 방식은 완전하지 못했다. 낮은 온도에서 뻣뻣해지는 약점을 극복하지 못했다. 숙제를 푼 이는 미국인 찰스 굿이어. 고온에서 생고무에 황을 첨가해 온도에 상관없이 고무의 성질을 안정시키는 가황 처리 기법을 발명했다.


19세기 최대 산업의 비밀이 해결되면서 고무는 산업과 생활 속으로 급속히 파고들었다. 호스, 벨트, 신발 바닥재, 스포츠 용품, 방수 용품, 철로 진동 완충재, 병마개, 타이어, 지우개, 장화, 콘돔이 잇따라 개발됐다. 급증한 고무 수요에 영국은 신속히 대응했다. 말레이반도 전역을 고무나무농원으로 바꾸기 시작했다. 근대 농상업 발전의 최후 단계로 일컬어지는 농원혁명이다.


20세기 초까지 세계 생고무 수요의 대부분을 공급하던 아마존에서는 원주민이 밀림에 자생하는 고무나무로부터 라텍스를 채취했다. 영국은 이 방법을 따르지 않았다. 거대한 고무나무 농원에 인도인과 중국인 노동자를 투입하는 집약적 생산방식을 택했다. 이는 말레이시아가 세계적인 고무 생산국으로 부상하는 원초적 동력이 됐다.

강희정 서강대 동아연구소 교수가 쓴 '아편과 깡통의 궁전'은 말레이시아 페낭섬에 영국 식민지가 건설된 이래 펼쳐진 동남아 화인(중국계 이민) 사회의 역사를 열거한다. 1786년부터 1930년대 말까지 페낭섬이라는 독특한 시공간에서 펼쳐진 동남아의 근대와 화인사회의 역사적 편린을 아편ㆍ주석ㆍ고무라는 키워드로 엮어간다.


저자는 말레이반도에서 뿌리내린 자본집약적 고무나무 농원이 시장 판도를 바꾼 점에 주목한다. 생고무는 1890년부터 수요가 급증했다. 그런데 아마존 분지는 큰돈을 벌어들이지 못했다. 오히려 생산량이 1910년부터 정체되고 자본수익률 또한 급감했다.


반면 말레이시아의 생고무 생산량은 생산 개시 10여 년만인 1913년 세계 생산량의 3분의 2를 차지했다. 세계 생고무 수요의 57.28%가 공급된 1932년을 정점으로 점유율은 줄었다. 하지만 20세기 중반부터 세계 최대 생고무 생산 기지의 지위를 유지했다.


영국의 자본집약적 고무나무 농원은 체계적이었다. 영국은 1876년부터 런던의 큐 왕립식물원에서 고무나무 묘목을 들여와 싱가포르에 이식하는 시험 재배를 했다. 시행착오 끝에 1883년 이식에 성공했다. 1890년대 초부터 고무나무를 재배하기 시작했다. 당시 싱가포르식물원 주임으로 부임한 H. N. 리들리는 고무나무 재배의 최대 공헌자로 말라카의 화인(華人) 탄차이얀을 꼽았다.


식물연구가 탄차이얀은 1896년 리들리의 권유로 말라카 인근 땅 40에이커(약 16만2000㎡)에 싱가포르식물원의 고무나무 묘목을 시험 재배했다. 그는 3년 뒤 실적이 좋게 나타나자 재배 면적을 3000에이커로 늘렸다. 영국의 한 투자자는 이 땅을 22만5000파운드에 사들였다. 탄차이얀은 초기 투자금의 여섯 배에 달하는 수익을 올렸다.


소문을 들은 싱가포르와 말라카의 화인 거상들은 앞다퉈 고무나무 농원 개발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1910년 이전까지 말레이반도의 생고무 생산량은 남미에 비할 바가 못 됐다. 1905년 말레이반도의 생고무 생산량은 약 200t. 반면 남미는 3만5000t에 달했다.


저자는 말레이반도가 시장 정세를 뒤집은 동력이 정치라고 한다.


"영국 식민 당국은 법과 제도 동원으로 유럽 자본가들의 고무나무 농원 개발을 지원했다. 토지법부터 손봤다. 19세기 말 말레이국연방에서 대규모 땅을 100년간 장기 임차할 수 있는 토지임대차령을 제정했다. 유럽인 농원 투자자들이 값싸게 농원부지를 확보할 수 있게 한 '보이는 손'이었다. 20세기 초에는 보다 편파적이고 급진적인 토지정책을 폈다. 페낭의 경우 식민 당국은 1906년 중국인과 말레이인이 소유한 나대지를 유럽인 상인과 농원주가 무상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특히 고무나무 농원 개발 과정에서 도로와 철로에 인접한 목 좋은 땅은 거의 유럽인 농원주에게 돌아갔다.“


식민 당국은 농원 노동자도 직접 통제했다. 이전 주석 광산 개발에서 광부 노동력을 페낭의 화인 자본에 위탁하고 방임한 것과 달리 노동자로 인도인을 끌어들였다. 1907년 인도인 이민위원회를 개설해 노동자 조달 기준을 정하고 이민기금을 마련해 뱃삯 등 이주 비용을 보조했다. 그 덕에 중국인(22달러)보다 5달러 적은 비용으로 노동자들을 고용할 수 있었다.


이 정책은 중국의 개입이 봉쇄되면서 한층 탄력을 받았다. 식민 당국은 1912년 중국인 노동자의 말레이반도 유입을 통제했다. 1928년에는 이민규제령을 통해 중국인의 해협 식민지 이주도 제한했다. 그 결과 1907년부터 1938년까지 말레이반도 전역의 농원에서 인도인 노동자의 비중은 73.7%로 높아졌다. 이 무렵 수마트라의 담배농원에서도 자바인(자바섬 중부와 보르네오섬 남부에 분포하는 인종)이 중국인 노동력을 대체했다.


저자는 "토지법과 중국인 노동 이주 규제는 중국인 거상들을 배제하고 유럽인 자본가들이 손쉽게 농원 개발을 주도하도록 식민 당국이 정치적으로 개입한 대표적인 예"라고 평가했다.


"정치와 경제가 한층 더 밀착된 제국 시대의 특징을 단적으로 드러냈다. 19세기 중반 자본의 시대에 '보이지 않는 손'은 19세기 말 제국의 시대에 '보이는 손'으로 바뀌었다. …런던 금융시장의 자본력을 바탕으로 해운과 보험 및 선진 경영 기법으로 무장한 유럽인 무역회사들이 독주하기 시작하면서 페낭 화인권은 위축됐다."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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