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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서의 On Stage]속 시원한 풍자 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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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스(다섯) 여섯 일곱…다스는 누구 거?…아무것도 할 수 없는 답답한 시대

조선시대 전기수 모티브 삼은 뮤지컬 '판'
인형극 이끄는 산받이와 이야기에 빠진 양반
신분사회와 권력에 대한 민초의 애환 담아내
관객에 말 거는 애드리브·흥겨운 노래 압권


뮤지컬 '판'의 한 장면. 사진제공=정동극장

뮤지컬 '판'의 한 장면. 사진제공=정동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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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장인서 기자] 19세기 말 조선 춘섬의 매설방(이야기방). 잽이(악사)들의 장단이 시작되자 '달수'가 부채를 들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한때는 양반가 도련님이었던 자신이 이야기꾼이 된 사연을. 노래 따라 흐르는 재담과 흥에 녹아드니 어느새 한바탕 박장대소가 쏟아진다. 저잣거리에서 펼쳐진 한판 놀음. 정동극장 뮤지컬 '판'에서다.
산받이의 첫 대사로 무대 위 정적이 깨진다. "저기 오네 그려. 당신들은 누구인가?" 전기수(조선 후기 낭독가) '호태'가 말한다. "아, 우리? 전국을 떠돌며 사람들에게 소설을 읽어주는 이야기 패요."

간단한 인사가 끝나자 산받이와 호태, 달수의 흥정이 벌어진다. 산받이가 "이야기 한 번 시원하게 풀어보시게나"라고 하자 500냥, 1000냥 이야기 삯을 실랑이하던 이들은 1만냥으로 합의를 본다. 달수가 부채를 흔들며 "허…. 그럼 이리 좋은 날 여기 모으니, 시원하게 한판 놉세"라고 말하고 산받이가 "그래, 한판 놉시다. 모두 좋다! 얼쑤!"라고 되받아치며 판이 시작된다.

뮤지컬은 조선시대 전기수를 모티브로 삼았다. 문맹이 많고 책도 귀한 시절. 전기수가 저잣거리에서 사람을 모아놓고 소설을 읽어주던 옛 풍경을 불러들인다. 바닥에 놓인 나무 패널과 솟대 모양 기둥, 청사초롱으로 그 시절 광장을 재현했다. 사람들과 소리, 사건과 이야기가 넘치던 놀이판이다.
뮤지컬 '판'의 한 장면. 사진제공=정동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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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둘 여자 둘, 그리고 산받이가 주요 등장인물이다. 달수는 과거시험에 급제하길 원하는 아버지의 기대와 달리 매일 저잣거리를 돌아다니는 도련님이다. 우연한 계기로 이야기의 맛에 빠진다. 호태는 뛰어난 입담으로 조선의 여인들을 홀린 희대의 전기수다. 춘섬은 주막을 겸한 매설방을 운영하며 살고 있는 여성으로 시대를 읽는 눈을 가졌다. 이덕은 매설방에서 이야기를 읽는 전기수들을 위해 소설을 필사하는 열정적인 인물이다. 이 외에 달수의 몸종 '이조'와 '사또', 매설방 손님 등의 인물들이 출연한다. 산받이는 원래 민속인형극인 '꼭두각시놀음'에서 인형과 대화를 하며 극을 이끌어가는 연희자다. 이번 무대에선 호태와 달수의 재담을 받아주기도 하고 관객들에게 설명을 해주기도 한다.

노래 열여덟 곡 중 판의 시작과 끝을 장식한 '이야기꾼'은 몇 마디만 들어도 따라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장단이 쉽고 흥겹다. 현악 오케스트라 반주가 일반적인 기존 뮤지컬과 달리 국악 라이브 반주를 활용해 전통 연희의 느낌을 살렸다.

'오늘 밤 규방 문 두드린 손님/ 조선 제일가는 전기수라네/ 잘생긴 잽이들 옆에 끼고/ 장단 맞춰 이야기 들려준다네/ (…) / 그의 이야기 판은 천 가지 연극마당/ 웅장한 남자처럼 놀기도 하고/ 살살 녹는 계집애의 자태를 짓기도 하네/ (…) / 부채를 들고 선 이야기꾼 한 마디에/ 이런 상상 저런 상상 다했었지/ 밝은 달이 떠오르는 이 밤에/ 끝없이 흐르는 이야기들/ (…) / 닭들이 울기 전까지/ 은밀한 이야기 판/ 거두지 마시오'

뮤지컬 '판'의 한 장면. 사진제공=정동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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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문학에 천일야화가 있다면 조선엔 전기수가 있었을까. 춤과 장단을 따라 들어본 달수의 사연은 이렇다.

몇 년 전. 서민들 사이에 흉흉한 세상을 풍자하는 패관소설이 퍼지자 세책가(책 대여점)를 중심으로 소설들을 모두 거둬 불태우라는 명령이 떨어진다. 이 무렵 달수는 세책가 앞에서 우연히 본 이덕에게 반한 뒤 무작정 그녀를 따라가다 매설방 앞에 당도한다. 살짝 열린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이야기꾼의 매력적인 목소리와 여인들의 들뜬 호흡소리. 목소리의 주인공은 전국 팔도의 매설방을 돌아다니며 특별한 기술로 여인들에게 사랑받던 전기수 호태였다. 이후 호태에게 낭독의 기술을 전수받은 달수는 낮엔 양반가의 도련님으로, 밤엔 야담을 읽는 이야기꾼으로 이중생활을 한다.

'패관소설 금지' '희대의 전기수' '뒷골목의 풍경' '꼭두각시놀음' '매설방' '평안감사 새 사냥' '검열' '새가 날아든다' '그런 이야기' 등으로 이어지는 노래에는 신분사회와 권력에 대한 민초들의 애환이 해학적으로 담겨 있다. 군데군데 관객에게 말을 거는 애드리브를 더하고 '다스는 누구 거?' '다스(다섯) 여섯 일곱 여덟' 등의 만담 같은 대사로 시점을 일탈하기도 한다.

권력을 풍자하는 언문소설, 저항을 결속하는 풍자소설, 사람들을 현혹하는 세책가, 윤리와 도덕을 어지럽히는 전기수를 샅샅이 수색하라는 사또의 명령이 떨어지자 이야기 패의 노랫소리는 더 커진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답답한 시대/ 달그림자 지고 나면/ 휘장을 걷고 문을 여네/ 저항하면 잡혀가는 위험한 시대/ 세상을 풍자하는 그 이야기/ 밤새도록 울려 퍼지네'

뮤지컬 '판'의 한 장면. 사진제공=정동극장

뮤지컬 '판'의 한 장면. 사진제공=정동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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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출은 변정주가 맡았다. 초연 멤버들이 원 캐스트(한 배역에 한 명의 배우만 출연)로 함께 한다. 달수 역에 김지철, 호태 역에 김지훈, 사또 외 역에 윤진영이 출연하고 춘섬 역의 최은실, 이덕 역의 유주혜가 새롭게 합류했다. 변 연출은 지난 7일 열린 개막 간담회에서 "조선의 권력자들이 이야기꾼들을 검열하고 그들의 입을 막는 것을 모티브로 삼았다"면서 "정치권력이 아니더라도 잘못된 권력은 언제, 어디서나 존재하기 때문에 보편성을 지닌 이야기"라고 했다.

이번 공연은 CJ문화재단(이사장 이재현)의 첫 제작지원 창작뮤지컬이다. 지난 3월 CJ아지트 대학로점에서 초연된 뒤 규모를 더 키워 무대에 올렸다. 신인 정은영 작가와 박윤솔 작곡가가 참여한 작품으로 전문가 멘토링, 2016년 리딩공연, 올해 본 공연은 작품 개발 단계를 거쳐 완성됐다. 또한 우리 예술 소재 발굴과 작품개발을 위해 올해 신설된 정동극장 '창작ing' 세 번째 무대이기도 하다.



장인서 기자 en1302@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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