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와 은행이 ‘파우스트의 계약’을 맺었다. 막대한 빚에 허우적대는 국가는 밑빠진 독과 같은 곳간을 채우기 위해 계속 차용증서를 찍어내고, 은행은 위기가 터지면 국가가 구제해 준다는 암묵적 약속 아래 보증할 수도 없는 빚을 내주고 있다. 독일 시사주간지 슈피겔은 지난달 23일(현지시간) 빚에 중독된 국가가 자신의 운명을 은행에 내맡기고 있다고 지적했다.
국가의 숨통을 금융권이 틀어쥔 극단적인 예가 사실상 국가부도 상태인 그리스다. 그리스는 자본시장에서 조달이 불가능한 상황이지만 계속 단기채권을 발행하며 목숨줄을 이어가고 있다. 그 부실 국채를 사들이는 이들은 다름아닌 그리스 은행들이다. 그리스 은행권이 국채를 사는 이유는 높은 수익률도 있지만 그리스 중앙은행에 채권을 담보로 맡기고 자금을 끌어올 수 있기 때문이다.
스페인과 이탈리아 은행권도 마찬가지다. 각 정부가 발행한 국채 대부분은 각 나라 은행들이 물량을 소화한다. 유럽중앙은행(ECB)이 시행 중인 고정금리 무제한 단기대출프로그램에서 빌린 돈 국채에 투자하고 있는 것이다. 논리는 간단하다. ECB의 대출이자는 1%지만 국채수익률은 6%가 넘는다.
그러나 슈피겔은 금융위기 이후 실시된 각종 금융권 자본건전성 강화 방안에서도 은행들의 국채 보유에 대한 내용은 빠져 있다고 지적했다. 그 예로 2013년부터 적용되는 ‘바젤III’의 경우 은행들로 하여금 위험자산에 맞춰 자기자본비율을 확충하도록 했지만 그 ‘위험자산’에서 국채는 해당되지 않으며, 독일·프랑스 등이 도입을 추진 중인 금융거래세도 국채·회사채는 적용 대상이 아니다. 이같은 무방비가 정부 재정이 국채를 매개로 은행에 종속되도록 부추기고 있다는 것이다.
독일 중앙은행 분데스방크의 옌스 바이트만 총재는 지난주 초 이같은 악순환을 시급히 끊어내야 한다고 촉구했다. 그는 “은행권이 국가부도 위험성에 지나치게 노출되지 않도록 더욱 강력히 규제해야 한다”면서 “은행이 기업에 대출할 때 이에 상응하는 완충자본을 마련토록 해 적정 상한선을 두는 것처럼 은행의 국채매입(투자)에도 반드시 상한선을 그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더 나아가 바이트만 총재는 은행들이 가진 국채를 안전자산으로 취급하던 것을 벗어나 위험자산처럼 자기자본비율 확충 대상으로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시장 전문가들로부터 호응을 얻었다. 마르틴 파우스트 프랑크푸르트금융경영대 교수는 “지난 유로존 부채위기에서 우리는 국채 역시 더 이상 안전자산이 아니라는 교훈을 배웠다”면서 적극 지지했다. 그러나 그는 “개별 국가의 부도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치적 이해관계가 걸려 있어 실현될 가능성은 낮다”고 덧붙였다.
김영식 기자 gr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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