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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예가 황종례 "한국 도자기, 세계 최고를 향한 꿈..지금도 진행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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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이규성 기자] 고양 벽제, '황종례 도예연구소'는 마치 은둔자의 거처처럼 산자락에 파묻혀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도예연구소라고 하기에는 그저 소박한 시골집을 연상시킨다. 입구의 작은 나무 간판을 제외하고는 어느 것 하나도 '한국도예의 산실'이라는 걸 느낄 수 있는게 없다.

무릇 대가(大家)들이란 요란한 포장으로 이뤄지는게 아니라는 듯 주변의 풍경 전체가 하나의 귀거래사로 다가온다. 물러나 앉아 자연과 예술에 귀의한 것처럼 연구소는 고즈넉하기만 하다.
벽제 연구소는 선친인 황인춘 선생의 청자, 오빠 황종구의 분청이 고스란히 보관돼 있는 곳으로 그 자체로 한국을 대표하는 도예가문 역사 뿐만 아니라 우리 도예사(史)의 한 부분을 이룬다.
 
연구소 안으로 들어서자 도예가 황종례가 백발만큼이나 하얀 미소를 보낸다. "힘든 걸음 했어요. 뭐 볼 것이 있다고 ? 차나 한잔 하시구려." 그녀의 뒷 배경으로 도자기가 가득 눈에 들어왔다. 애초부터 그녀는 도자기와 하나였던 것처럼 보인다.

낯선 방문객의 발길이 그녀가 빚은 분신과 고요한 시간을 흔들었을까 ? 전시장의 도자기들이 일제히 거칠고도 벅찬 숨소리를 토했다. 옥빛 화병에선 산들이 하늘을 향해 솟구치는가 하면 푸른 보리밭이 춤춘다. 분청 항아리의 복판에선 파도가 넘실댄다. 작은 접시 안에서도 소용돌이가 일었다가 다시 접시밖으로 뛰쳐 나온다.

"대학에서 회화를 전공한 것이 귀얄문 복원에 동기가 됐어요. 대학원 시절 도예를 연구하는 동안 여러 문헌 등을 통해 귀얄문이라는 전통 방식을 찾아냈죠. 한국적인 도자기를 만드는데 아주 유용해요. 우리 도자기는 곡선이 아름답죠. 곡선은 도자기 뿐만 아니라 건축 등 여러 분야에 적용된 한국적 디자인이죠. 거기에 귀얄문으로 역동적인 회화를 가미하면 독특한 세계가 연출됩니다. 작은 접시에도 단숨에 휘감듯이 붓칠을 하면 훌륭한 무늬를 만들어줍니다.일종의 유약처리방식이기도 하고요."
도예가 황종례의 작품은 역동적이며 생명력 있는 회화가 도자기 표면을 장식한 것이 특징이다. 이런 회화적 방식은 '귀얄문'이라는 전통적 유약처리에서 나온다.

도예가 황종례의 작품은 역동적이며 생명력 있는 회화가 도자기 표면을 장식한 것이 특징이다. 이런 회화적 방식은 '귀얄문'이라는 전통적 유약처리에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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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회화와 도자기를 결합시킨 그녀의 독특한 작품은 '귀얄문'이라는 전통 기법이 없이는 설명하기가 어렵다. 귀얄문은 돼지털이나 말총을 넓적하게 묶어 만든 풀비인 귀얄로 만든 무늬다. 귀얄문 기법은 먹그림처럼 단숨에 붓칠하는 전통적인 양식이다. 일제와 6.25전쟁을 거치는 동안 맥이 끊겼던 귀얄문은 그녀의 작품속에서 처음으로 되살아났다. 도자기 표면에 역동적이며 생명력 있는 회화를 그려넣는데 적합한 귀얄문은 이제는 아주 일반적인 방식이다. 그런 면에서 수많은 후배 도예가들이 그녀의 은총을 받은 셈이다.

그녀과 귀얄문의 세계에 천착한 것에 대해 "정적인 형태의 도자기에 역동적인 느낌의 회화를 접목시킬 경우 전통 도예가 더욱 현대적 느낌을 갖게 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며 "귀얄문은 잠시 맥이 끊겼던 표현 기법으로 내가 복원해낸 것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녀에게 있어 전통의'복원'은 집안 내력에서 기인한다. 선친인 황인춘 선생은 해방 이전부터 황해도 개성에서 가마와 도자기 제조공장을 운영했다. 선친은 고려청자의 복원에 평생을 바쳐 조선시대 이후 사라졌던 청자의 맥을 되살린 분이다. 오빠인 황종구 또한 청자와 분청의 전통을 이어왔다. 여기에 그녀는 귀얄문을 더해 전통도예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데 주력했다.

오빠와는 달리 그녀는 현대의 조화를 꾀하는 작가주의적 성향이 강했다. 한국적인 것을 바탕으로 회화적인 요소를 가미한 그녀의 작품은 한국 도자기를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 올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오늘날 대영박물관이나 미국의 스미소니언 미술관 등 세계 유수의 박물관에 그녀의 작품이 소장돼 있는 까닭이기도 하다.그처럼 한국 현대 도예는 벽제의 산실에서 한걸음 도약했다.

"72년 신촌에 도예연구소를 처음 문을 열 당시 주로 외국인들에게 한국도예를 가르치고 알려왔죠. 또 대학에 나가 후학을 양성하느라 늘 분주했어요. 그러나 27년전 벽제에 들어온 이후 후학을 가르치는 것 외에 직접 유약을 개발하고, 흙을 만지고, 가마를 관리하는 도예가로서 온전히 살 수 있어 행복했죠. 이제 남은 시간 내가 무엇을 해야할 지 다시 고민하고 있어요."

올해 86세. 평생 도예가로 살아온 그녀의 마지막 과제는 '나눔'이다. 그것은 단순한 나눔이 아니다. "내 작품이 필요한 사람이 있기를 바라죠. 필요한 곳이 있다면 다 내줄 생각입니다. 가령 기업이 해외에 나가 기업활동에 활용하겠다고 한다면 그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세계가 한국 도예의 예술성을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것이 후학들에게 조금이나마 기여하는 일이겠지요. 평생 내가 이룬 작품이라도 내 것만은 아니죠. 예술 작품이란 시대와 공간을 초월해 함께 공유하는 것이지요. 우리 도자기를 세계에 알리는 것이 내 마지막 과제인 셈이죠."
 

세계를 향한 그녀의 꿈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68년 그녀는 우리 도예가들과 함께 첫 전시회를 열기 위해 도일했던 경험을 잊지 못 한다. 일본은 이미 전기 물레와 가마가 상용화돼 있는데다 도자기와 도예가를 대하는 사회적 인식에 놀랐다. 우리들과는 달리 도자기는 최고의 가치를 지닌 예술품 대접을 받았다. 또한 일본 도자기가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것에 경악했다.

"우리의 우수한 도예 전통을 가지고도 일본에 낙후돼 있다는 생각에 눈물을 쏟아졌어요. 항상 한국도예의 척박한 환경에 아픔이 많았죠. 우리는 한 때 일본에 도자기는 물론 다양한 문물을 전해줬죠. 그곳에서 새로운 고민이 싹텼어요. 우리 정서와 혼이 담긴 그릇을 만들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것도 그 때였죠. 우리는 한동안 외래문화를 추종하는데 급급했어요.우리 것이 소중하고, 더 뛰어날 수 있다는 생각을 못 했죠."

그녀의 예술 여정은 글로벌 시대에 닿으면서 더욱 견고한 견해를 낳는다. 그녀는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며 한국적 디자인을 지녀야만 예술가로서의 혼이 나온다"고 말한다. 그녀는 후학들에게 "우리 정신을 담지 않으면 그저 외국을 흉내내는 모방꾼에 지나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한국적 아름다움은 선조 도예가의 길을 따라온 그녀의 일관된 논리다. 그러면서도 도예의 현대성을 표현한 그녀로서는 항상 눈길이 세계로 향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전승가인 그녀에게 '글로벌'이라는 주제는 오랜 도예 여정에서 피할 수 없었던 숙제인듯 하다. 그러고 보면 작품과 더불어 작가 자신도 시대의 반영 임을 보여준다. 아니다. 오히려 작가가 먼저 시대의 반영여야 작품이 그 뒤를 따르는 것일 수도 있다.

"지금 한류가 세계로 뻗어가듯이 우리 도자문화도 하루 빨리 해외로 나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계인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우리만의 디자인을 만들어야 합니다.한국 도자기에 세계인이 감동하는 날을 꿈꿉니다."

한국 도자기가 세계인을 감동시키려면 "우리의 기법과 디자인, 우리의 산천, 우리 정서, 우리 문화를 담아야 한다"고 설명한다.

그녀의 꿈은 여전히 진행중이다. 그것은 한국 도예가 세계의 한복판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남은 열정을 모두 쏟아붇겠다는 각오다. 벽제의 작업장 한켠에서는 지금도 그녀의 물레질이 계속되고 있다.

 ◇ 도예가 황종례 약력
 * 1927년 개성 출생
 * 1962년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도예과 졸업
 * 1965∼1966년 상명여자사범대학 미술교육과 조교수
 * 1975∼1993년 국민대학교 조형대학 공예미술학과 교수
 * 1993∼현재 국민대학교 조형대학 공예미술학과 명예교수
 * 1972년 황종례 도예연구소 설립




이규성 기자 pe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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