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사망] 5·18 발포 명령의 진실도 영원히 묻혔다
5월 광주의 핵심 책임 당사자, 역사적 과오 반성 없이 세상 떠나
[아시아경제 류정민 기자] 결국 한 마디 반성도 없이 세상을 떴다. 5·18 광주 민주화운동 발포 명령자에 대해서도 끝내 입을 닫았다.
1979년과 1980년, 격동의 대한민국 역사에서 그는 중심 인물이었다. 1979년 3월 국군보안사령관이 된 그는 10월26일 박정희 전 대통령 피살 사건 당시 합동수사본부 책임자를 맡았다.
군 내부의 정보를 세세하게 파악할 수 있었던 그는 공식적인 권한까지 갖게 되면서 세력을 확장했고, 1979년 12·12 군사 쿠데타를 주도했다. 대대적인 군 인사를 토대로 군을 장악한 그는 실질적인 최고 권력자로 등장했다.
현대사의 비극인 5·18 광주민주화운동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1980년 서울, 부산, 광주 등 전국 곳곳에서 민주화운동이 이어졌는데 신군부는 광주에 계엄군과 공수부대를 보내 대대적인 진압작전을 벌였다.
수많은 사상자가 나왔고 비극의 후유증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전 전 대통령은 5월 광주의 핵심 책임 당사자이자 발포 명령의 비밀을 알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그는 역사 앞에서 진실을 알리지 않은 채 세상을 떴다.
그는 이른바 ‘체육관 선거’로 불리는 선거를 통해 제11대, 제12대 대통령에 올랐다. 특히 1980년 8월27일 최규하 대통령의 잔여 임기를 채울 대통령 보궐선거에서는 통일주체국민회의대의원 2540명 중 찬성 2524명, 무효 1명, 기권 15명이라는 압도적인 찬성으로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
투표는 사실상 형식이었고 신군부를 이끌던 그를 청와대 새 주인으로 앉히는 절차에 불과했다.
그가 실권을 장악하던 1980년대는 삼청교육대로 대표되는 인권 탄압의 시대였다. 이른바 깡패 소탕이라는 명목으로 수많은 이가 뚜렷한 이유도 모른 채 삼청교육대로 끌려갔고,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당했다.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전두환 정부에 저항하는 민주화운동이 이어졌고 1987년 절정에 이르렀다. 박종철 열사, 이한열 열사 등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목숨을 잃었던 이들의 아픈 역사도 그의 집권 기간 벌어진 일이다. 언론통폐합 조치를 통해 국민의 눈과 귀를 가리는 폭거도 자행됐다.
전두환 전 대통령 집권 시기는 철권통치의 기간이었다. 다만 경제적으로는 1980년대 저유가, 저달러, 저금리 등 ‘3저 호황’과 맞물려 고도성장을 경험했다.
전 전 대통령의 공과를 평가해야 한다는 의견이 일부에서 제기되는 것도 경제적 평가와 맞물려 있다. 다만 경제 시스템의 발전을 토대로 한 성장이었는지, 세계적인 시대 흐름에 맞물려 운이 좋았던 것인지는 따져볼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있다.
전 전 대통령은 퇴임 이후 자신의 잘못에 대한 사법적 단죄를 받았다. 1심에서 사형, 항소심에서 무기징역까지 선고받으면서 군사 쿠데타의 주역에 대한 심판이 내려지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1997년 그는 사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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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는 추징금도 완납하지 않은 채 버텼고, ‘재산 29만원’을 둘러싼 논란으로 세상의 조롱을 받기도 했다. 그는 가장 강력한 권력을 행사한 인물로 평가받지만 한국 정치에서 그의 이름은 경계의 대상이다. 그가 현대사에 남긴 상처가 너무나 크고, 지금도 그 상처로 고통받는 이가 많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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